로마의 콜로나 가문과 우르시니 가문 인문

제11세기 초두, 伊太利(이태리)는 君主(군주)에게나 民衆(민중)에게나 한결같이 억압적인 봉건적 暴政(폭정)에 노출되었다. 人間(인간) 본연의 권리들은 수많은 共和國(공화국)들에 의해 옹호되었고 곧 그들이 자기들 자유와 지배를 도시로부터 인접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貴族(귀족)들의 劍(검)은 부러졌고, 그 奴隸(노예)들은 解放(해방)되었으며, 그들의 城郭(성곽)은 헐리고, 이제 사교와 복종의 습관을 들였고, 자신들의 야망을 자치체의 영예직에 한정시켰으며, 베니스와 제노아의 자부심 강한 貴族政治(귀족정치) 상에서도 각 파트리키아누스 家門(가문)이 법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질서한 로마의 政府(정부)는 내부의 반란적 후예들을 요리할 일을 감당치 못해, 반도들이 성벽 안팍에서 政務官(정무관)들의 권위를 비웃었다. 이는 政權(정권)을 위한 貴族과 平民(평민)간 싸움은 더이상 아니었다.  豪族(호족)들이 무장하며 獨立(독립)을 선언했고, 그들의 宮殿(궁전)과 城砦가 포위에 대비 강화되고 이들의 사적인 싸움이 수많은 封臣(봉신)과 從士(종사)들에게 맡겨졌다. 출신과 정서 상으로 그들은 그 지역에서 외지인이였고 진짜 로마인이라면 市民(시민)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자칭 로마의 君主로 칭하는 이런 오만한 이방인들을 외면하였을 것이었다. 일련의 검은 革命(혁명)들이 지난 후 族譜(족보)란 것들은 죄다 망실되었고, 家門의 이름들은 없어지고, 血族(혈족)의 혈통 수천 갈래가 한데 뒤섞였다. 고트族(족)과 롬바르드族, 희랍族과 프랑크族, 게르만族과 노르만族이  王家(왕가)의 恩賜(은사)나 勇猛(용맹)이라는 特權(특권)을 통해 가장 좋은 소유권을 얻어갔다.  이런 예들이 추정될 만한 것들은 널렸지만, 히브리人(인)이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 직위까지 올라선 것이 이들 비참한 유랑 망국민들의 긴 幽囚(유수) 속에서는 비길 데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레오 9세 시대에 한 부유하고 학식있는 猶太人(유태인)이 基督敎(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의 代父(대부)인 당시 敎皇(교황)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레오의 아들 피에트로(Peter)의 열정과 용기가 그레고리 7세의 대의에 두드러지며, 교황은 이러한 그의 충직한 지지자에게 하드리아누스의 靈廟(영묘)와 크레스켄티우스의 塔(탑) 즉 소위 산탄젤로城(성)의 통치를 위임했다.  父子(부자) 양쪽이 무수한 자손을 가졌다. 고리대의 수익인 그들의 富(부)는 도시의 최고 귀족가문에게 배분된 채 광범위한 동맹자들을 끌어들여, 이 改宗者(개종자)의 손자는 성베드로의 玉座(옥좌)에 오르는데 조상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다수의 성직자와 민중이 그를 지지했다. 바티칸에서 수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아나클레투스(Anacletus)에 對立敎皇(대립교황)이란 칭호가 붙이게 된 것은 겨우 성베르나르(St. Bernard)의 언변과 이노켄티우스 2세의 최후의 개선에 의해서 일 뿐이었다.  그의 패배와 죽음 이후로는, 레오의 후손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 현재 야심만만한 貴族 중에 猶太 혈통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에 몰락하거나 현재까지 변형된 영화를 이어가는 가문들을 거명하는 것이 著者(저자)의 계획은 아니다.  프란지파니家의 오랜 집정관 가계는 기근시대에 빵을 쪼개 나누어 먹은 인심 속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고 이런 자선은 그들의 동맹이었던 코르시(Corsi)家와 함께 요새들로 둘러 싼 도시 내 넉넉한 공간에 문을 걸어잠근 것 이상의 진정한 영광이다. 사비니族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벨리(Savelli)家는 옛 존엄을 유지해 오고 있고, 카피주치(Capizucchi)家의 낡은 칭호는 첫 원로원 의원들의 동전에 새겨졌다. 콘티(Conti)家는 시그니아(Signia)의 백작들의 영지 없는 영예를 보유하고 안니발디(Annibaldi)家는 카르타고 영웅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아주 무지하거나 아주 평범해졌을 것이다. 

도시의 동료나 군주들 중에 콜로나(COLONNA)와 우르시니(URSINI) 家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들의 가문의 이야기야 말로 현대 로마 年代記(년대기)의 정수다.  I. "콜로나(Colonna)"란 이름과 문장(紋章)은 아주 의심스런 어원적 유래를 가진다. 연설가나 골동품 애호가들이 트라야누스의 기둥이나 헤라클레스의 기둥 혹은 예수가 태형받은 기둥, 또는 사막에서 이스라엘人을 안내한 빛나는 기둥들에 이르기까지 기둥이란 기둥은 간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1104년의 역사적 첫 출현은 그 힘과 전통을 증언하나 이름 자체는 단순한 의미만 설명한다. 카바이(Cavae)의 찬탈에 의해 콜로나家는 파스칼(Paschal) 2세의 군대를 자극했지만 합법적으로 자갈롤라(Zagarola)와 콜로나(Colonna)의 세습영지를 로마의 캄파냐(Campagna) 평원에 보유했고, 후자의 영지의 도시들은 저택과 사원의 유적인 우뚝선 기둥으로 아마 치장되었을 것이다.  이웃 도시 투스쿨룸(Tusculum)의 절반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데서 투스쿨룸 백작들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추정케 하는데 이들은 10세기 使徒座(사도좌)의 폭군들이었다. 그들 자신과 대중적 견해에 따르면, 가장 근원적인 먼 유래는 라인강 어귀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독일의 君主들은 700년의 혁명 동안 때론 재능으로 언제나 부로 증명해온 한 귀족 가문과의 친연성이 가짜든 진짜든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13세기의 끝에, 가장 강력한 지파는 교회존중과 무력면에서 두드러진 6형제와 삼촌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피에트로(Peter)가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개선마차를 타고 카피톨 언덕으로 안내되어 카이사르(Caesar)라는 헛된 구호와 갈채로 환영받았다. 요한(John)과 스테펜(Stephen)이 안코나(Ancona) 후작과 로마냐(Romagna) 백작으로 선언된 것은 니콜라스 4세에 의해서인데 너무나 편향적 후원자인 탓에 풍자적 초상으로 속이 빈 기둥 속에 幽囚된 것처럼 그려졌다.  그의 죽음 후에 그들의 거만한 행동이 인류 중 가장 냉혹한 인간의 불쾌를 사게 되었다. 삼촌과 조카사이인 두명의 추기경은 보니파티우스 8세의 선출을 부인했고 콜로나家는 일시 그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무력에 억제되었다. 그는 그의 개인적 적들에 대항해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영지가 몰수되고 티베레 양안의 요새는 성베드로의 군단과 경쟁 貴族들에게 포위되었다.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혹은 프라에네스테(Praeneste)가 폐허화한 후, 그들의 주 근거지는 땅에 영구적 황무지화의 상징인 쟁기날로 표식되었다.  몰락하고 추방되어 수배된 6형제는 구원과 복수의 희망은 버리지 않은 채 위험한 위장 도피로 유럽을 배회하였다.  그 두 희망의 입장에서 프랑스 궁정이 가장 확실한 피신처였다. 그들은 필립(Philip)의 사업을 촉진하고 지도했다. 그리고 著者는 그들이 幽囚된 폭군의 불운과 용기를 존경하였다면 그들의 관대함을 칭찬하고 싶다. 그들의 民法(민법)은 로마 民衆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콜로나의 영예와 소유가 그들에게 회수되었다. 몇몇 추산을 해 보자면 그들의 富는 그들의 상실에 의해 평가할 수 있고, 그들의 상실은 故人(고인) 된 교황의 조력자들와 상속자들에게 부과된 10만 플로린의 금화의 손실에 의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적 검열과 부적격판정들이 그의 신중한 후계자들에 의해 철회되었고 그 家門의 재산은 일시적 태풍에 의해 더 확고해졌다. 스키아라 콜로나(Sciarra Colonna)의 대담성은 보니파티우스의 幽囚에서 그리고 한참 후 바바리아(Bavaria)의 루이스(Lewis)의 대관에서 두드러진다. 황제의 감사로 그들 紋章  속 기둥은 왕관을 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명성과 재능에서 家門의 으뜸은 老(노) 스테펜인데, 페트라르카(Petrarch)가 그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어 고대 로마 시대 비길 英雄(영웅)으로 존애한 이다. 박해와 추방에서도 그는 民族에게 그의 평화와 전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준다. 고난 중에 그는 동정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다. 다가올 위험은 그의 이름과 조국을 공언케 하였다. "이제 어디에 당신의 요새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가슴에 손을 얻고 "여기"라고 답한 것이다. 같은 덕성으로 후손의 귀환을 지원했다. 쇠퇴하는 그의 시대의 종말까지 스테펜 콜로나의 어른들, 성격, 자식들은 로마 공화국에서와 아비뇽(Avignon) 궁정에서의 그의 고결함에 우쭐댔다.   II.    우르시니家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이주해 왔다. 뛰어난 인물들로 12세기에 그려지는 우르수스(Ursus)의 아들들은 겨우 이 족속의 아버지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혈족의 수, 용감, 원로원과 추기경회의 영예, 셀레스틴 3세와 니콜라스 3세란 그들 혈통의 두 교황의 등극으로 곧 로마 귀족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들의 富가 족벌주의의 초기 남용으로 비난될 수 있다. 성베드로의 영지가 그들의 호의 속에 셀레스틴에 의해 양도되었고 니콜라스는 그들을 위해 군주들의 동맹을 간청하고 롬바르디와 투스카니에 새 왕국을 세우고 로마 원로원  종신의원직을 수여하게 할 야심을 가졌다. 콜로나家의 위대성에 보인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 오래 이어온 싸움에서 대등한 적인 우르시니家의 영광에 도 보인다. 그것이 교회적 국가를 250년간 교란시켰다. 월등함과 권력에 대한 질투심은 그들 싸움의 진짜 배경이었지만, 훌륭함의 허울적 표식으로 콜로나家는 기벨린(Ghibelines)이란 이름과 帝國(제국)의 黨(당)을 품었고 우르시니家는 겔프(Guelphs)란 칭호와 교회의 대의를 옹호했다.  독수리와 열쇠들이 적대자의 기치에 나부꼈고, 그 싸움의 유래가 잊혀진지 오래가 되어도  伊太利의 두 당파는 서로 거세게 부딪혔다.  교황이 아니뇽으로 물러간 후에, 임자 없는 공화국을 무력으로 다투었고 매해 경쟁자로 원로원 의원 두 명을 뽑는 너절한 합의로 불화의 오류가 영속화되었다. 그들의 사적 적대에 의해 도시와 모국이 황폐화되고 흔들리는 균형 속에 성공은 수시로 교대되었었다. 그러나, 우르시니 家의 가장 명성있는 대장이 少(소) 스테펜 콜로나에 의해 기습 살해되기까지는 어느 쪽 家門도 칼날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개선은 휴전을 파괴했다는 비난으로 얼룩졌다. 그들의 패배는 교회 문앞 순진무구한 아이와 두명의 조력자들의 암살로 되갚아졌다. 승리한 콜로나는 한 단년 임기의 동료 의원과 함께 5년 기간 동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언되었다.페트라르카의 詩想(시상)이 이 관대한 젊은이 그의 영웅의 아들이 로마와 伊太利에 본래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그의 정의가 대리석 기둥의 영원한 지주를 전복하려한는 영원한 늑대와 사자, 뱀과 곰들을 박멸할  한 소망, 한 희망, 한 예언을 고무시켰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제69장



전체적으로 기번의 로마사는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로마사 나아가서는 유럽사를 개관하는 구도다. 다만, 마지막에 다시 그는 동서로마의 기원이 되는 도시 로마의 역사로 되돌아와 복잡한 심경으로 기나긴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교황 자신이 주권자가 되고 로마에서 나중에는 실질적으로는 호족들이 그 주권을 찬탈하고 교황을 꼭둑각시로 만들었다는 이 당시 교황령의 역사지만, "호족들의 역사를 모두 기술하려는 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기번의 말처럼 소략해서 기번의 말만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한다. 대표적으로 콜로나가문와 그들의 맞수 우르시니가문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 아비뇽 유수가 시작되던 시기의 보니파티우스 8세와  공정왕 필립과 콜로나 가문의 얽히고 섥힌 관계들을 소개된다. 콜로나 가문의 상징이 "기둥(column)"이 되었다는 가벼운 웃음이 나올 만한 일에 시성 페트라르카 마저 진지하게 송시를 바쳤다는 데서는 쓴웃음 짓게 한다. 문득 콜로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 하는 엉뚱한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