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와 아에티우스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75 로마제국쇠망사


훈족은 보다 강력한 힘을 내는 복합궁과 등자를 이용한 혁신 등을 가져왔고 이를 바탕으로 초원을 제패하고 고트족과 알란족과 라인이동의 게르만족 들까지도 밀어내 처음에는 동로마를 나중에는 서로마 전역을 게르만족의 소동으로 빠뜨렸다. 이 중에 유럽을 돌아 아프리카로 들어간 반달족은 다시 훈족과 협조하에 계속 동서로마를 농락해 부를 잠식하거나 착취하게 된다. 훈족은 게르만족이 버리고 간 땅을 급속히 통합해 갔고 그 중심에는 훈족의 유일한 통치자였던 루아(Rua) 왕이 있었다. 그 역시 후계자 블레다(Bleda)와 아틸라(Attila)가 그랬듯 자신의 형제 한 사람이 죽기 이전까지는 공동통치자 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틸라 이전의 불분명한 훈사(Hun史)는 그 이전에는 훈족 안에 제각각의 지배자들이 난립된 상태였음을 비친다.

적어도 서로마에 있어서는 이러한 훈족의 발전이 제국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기간이 있었다. 과거 스틸리코가 울딘의 도움을 받았듯이, 가우덴티우스의 아들 아에티우스 역시 이런 훈족의 발전에 도움을 받았다. 이런 아에티우스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 그가 훈족의 인질로 잡혀있었다는 점을 들수 있는데, 이 중에 아틸라와도 우정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가우덴티우스의 선조 자체도 스키타이계통 즉 훈족과 문화적 친연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는 아프리카 백(count of Africa) 등을 비롯해 제국의 방위를 위해 중요한 직을 두루 역임한 무관으로, 한편 테오도시오스 황제의 내전에도 참가했다. 어머니는 로마 귀족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귀족층 자제들 처럼 소년기 부터 무관가문의 엘리트 사관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의 일부로 이민족의 궁정에 볼모로 잡혔다. 처음에는 알라릭의 궁정으로 보내졌으며 다음으로 훈족에게로 보내졌다. 423년 호노리우스 서로마 황제가 사망하였을 때 그는 이미 이미 가장 영향력있는 친야만인파 무관이자 정치인이 되어 훈족으로부터 후계자 요하네스의 제위를 동로마의 간섭으로 부터 지켜 줄 대군을 빌려왔고, 비록 참제 요하네스가 이미 처형되었지만 이후부터 다른 몇몇 장군들과 함께 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최후에는 단독통치자가 되어 훈족의 아틸라를 상대하게 되었다. 후세인들이 그린 인내심있고 신중한 아에티우스의 모습은 통치자로서 안성맞춤의 성격이었다. 단독통치자가 되기 전에 갈리아 지방의 크고 작은 소란을 잠재우고 서로마를 통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권교체의 혼란을 틈타 다시 협정을 깨고 아를르르 포위하는 비시고트족을 물리쳐 신정권에 대국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즉시 보여주었다. 곧이어 살리 프랑크가 침략해서 점거하는 땅을 회복했으며 주로 서북지방에 출몰하는 바가다우에의 활동도 억제하였다. 이는 또한 아틸라가 왕좌를 차지하기 까지 훈족이 로마와 아에티우스에 중요한 기여이기도 하다. 또한 아틸라 시대에는  그 자신의 전처 소생의 아들 가르필리오(Carpilio)를 아틸라궁정에 인질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몸소 아틸라의 측근 몇 사람을 추천하여 소개했던 것을 보면 시절 훈족 막사에서 아틸라와 아에티우스가 우정을 키웠다는 것도 그럴법한 말이라 하겠다.

아틸라와 아에티우스가 주도한 이 시기 역사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반달왕 가이세릭이었을 것이다. 기번에 의하면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알라릭과 아틸라를 잇는 삼악(三惡)의 하나인 그는 그 시대엔 남쪽의 아틸라였다. 훈족의 발전은 그 과정에서 가이세릭과의 직간접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졌고 로마에 대항하는 이민족 지배자라는 면에서 가이세릭은 아틸라와 매우 닮았다. 사실 아에티우스의 정적인 보니파티우스를 아프리카에서 축출하면서 기반을 상실하게 했던 것도 가이세릭의 반달족이었다. 그의 가렴주구와 탄압으로부터 많은 아프리카로 부터의 망명객이 생겨났고 카톨릭을 박해하였으며 병사들을 잃은 분풀이로 도시들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고문 살해했다. 그러함에도 목적을 위해 발휘하는 융통성에는 누구못지 않던 가이세릭은 로마와의 평화협정의 댓가로 아들 훈네릭을 인질로 보내기까지 하다가 불시 카르타고를 빼앗았다.

훈제국은 루아 왕(王) 당시에 이미  유약한 대외정책을 계속하는 테오도시오스 황제 하의 동로마로 부터 년간 350 파운드의 금의 세공을 약속받고 있었으니 후계자인 아틸라와 블레다에게도 튼튼한 제국을 물려줄 수 있는 입장이었다. 동로마는 훈족을 견제하기 위해 아마도 중간지대의 4개부족들을 자극해 훈족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했지만 아마도 실패로 돌아가 대부분 반란자들이 로마로 망명했던 것 같다. 양측에서 이 분쟁의 해결을 위해 강화사절이 오가고 있었는데, 훈족에서는 로마문제를 전담하는 에슬라스(Eslas)가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에서는 플린타스(Plinthas)와 디오니시오스(Dionysius)라는 장군이 사절임무를 맡았지만 강화조약은 마무리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의 죽음으로 협상이 중단되었는데 계승자 블레다와 아틸라는 마르구스(Margus)에서 마상회담 끝에 년공을 두배 700파운드로 인상함으로써 훈제국의 위상을 새삼 높였다. 여기에는 인질 각기 망명자들의 문제들도 주요 관심사였다. 이와는 별도로 로마인포로 인당 금화 8매의 몸값도 매겼다. 기번의 시각에 의하면, 이 이후로 그는 최초의 스키티아와 게르마니아를 공히 통치한 임금이 되었다. 라인강에 이르는 부르군트족의 절멸과 프랑크족의 내분에 대한 개입 등이 다 스키티아와 헝거리 평원을 넘어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던 사상 최초의 스키티아와 게르마니아의 통합군주 아틸라의 위상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후 두 형제왕은 추가적인 공세나 직접적 침공을 통해 동로마로 부터의 세공을 더 늘린다.

약 5년 쯤 후인 440년에는 훈족이 도발을 시작하여 마르구스 주교가 역대 훈족 왕릉을 도굴했다는 핑계로 국경의 콘스탄차(Constantias) 요새를 함락시킨다. 교통상 요지인 마르구스를 함락하는 방법은 쉬웠다. 죄를 지은 주교를 넘겨달라고 요구하자 인심을 잃은 마르구스 주교가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훈족에 일어난 전쟁의 양상을 보면 발리프스(Valips)란 인물의 경우 노비두눔을 함락한 후 포로가 된 아이들을 인간방패로 세워 로마의 탈환시도를 막을 정도로 교활하고 잔인함이 심하였다. 또한 마르구스 인근 나이소스(Naisus)에서는 공성전까지 벌여가며 이를 함락해 훈제국의 무력을 동로마에 과시하였다. 이 때 두 공동왕의 어깨가 으쓱하게 또 한 번의 년공 인상에 대한 강화조약에 포함되었으나 애당초 동로마 측에서는 실제로 이를 이행하려 할 생각이 없었으며 반달 원정을 떠난 원정군의 귀환으로 전력이 보강되자 연공 지불을 중단했다.

한편, 이 기간 중엔 아에티우스와의 좋은 관계도 계속되었다. 보니파티우스에게 패해 달아났을 때 그에게 실질적 서로마의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훈족이었다. 그는 훈족에게 할양했으며, 유명한 <니벨룽겐의 노래>의 배경이 된 부루군트족의 멸망(436년)이라는 사건은 훈족의 협력을 받아 아에티우스가 이뤄낸 것이었다. 이후 그들은 사보이로 옮겨졌으며, 다른 갈리아 내의 할거세력들 고트족, 프랑크족, 바가다우에 등의 도전이 아에티우스에 의해 때마다 진압되어 이들 모두 아슬아슬하게 제국의 통제 하에 들어있었다. 다시 나르본에 나온 고트족이 부관인 리토리우스(Litorius) 백(伯)에게 격퇴되었고, 메로빙거가의 선조가 될 프랑크의 왕의 비슷한 야심도 훗날 난세에 꿋꿋이 맞선 비운의 황제 마조리아누스아 함께 잠재웠고, 절멸되다시피한 부루군트족은 사보이로 옮겨졌다. 이 당시 아에티우스가 맡았던 서로마의 대장군직은 한마디로 일뵨의 쇼군과 같이 거의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와는 별도로 세습적인 실질적 통치권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 널리 인정될 정도였는지 이미 그의 어린 아들에게 통치권을 물려주고 은퇴를 생각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어린 아들 가우덴티우스는 그가 보니파티우스의 미망인에게 새장가든 후 본 아들이었다.




훈족이 동방에서 왔다는 근거가 되는 그들의 동복. "훈"과 "흉노"가 적어도 동일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는 정도는 문헌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년공 지불이 중단된 기간 중에 블레다가 사망하였는데 공동통치자인 아틸라가 음모한 것이라고 알려진다. 이런 내분 때문인지 한동안 훈족의 적극적인 활동은 중단되었다가 447년 전력을 비축하고 정비한 아틸라가 드디어 동로마에 대한 징벌에 나선다. 과거 훈족은 코카서스 지방을 통해 로마와 페르시아 두 제국을 휩쓴 대원정을 한 바가 있었다. 395년 테오도시오스 황제의 서정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어수선한 틈을 타 트라키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시리아의 동로마 속주들을 유린함과 동시에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로 들어가 수도 크테시폰 까지 위협하다 왕의 군대에 패퇴한 적이 있었다. 아틸라는 항상 동로마와 서로마 그리고 페르시아 3개의 침입에서의 약탈과 협상을 통해 재정을 보충하려는 것을 염두해 두었고 이 때까지는 동로마가 가장 입을 손실에 비해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틸라가 쳐내려오던 그 해 년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지진이 있는 성벽이 무너졌는데 재빨리 수리되지 않았다면 큰 위기를 맞을 뻔 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트라키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나아가 그리스 쪽으로 테르모필레까지 나아갔고 다르다넬로스를 건너서는 아시아로 까지 진출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도 마지못해 그간의 밀린 년공을 갚고 다시 증액된 년간 2100파운드의 금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강화를 맺었다. 여기서 각 망명자들에 대한 송환에 대한 조항도 있었는데 대개 로마포로에는 자유를 위해 몸값을 매기지만 훈족의 포로나 망명자들은 무료 혹은 강제 송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강제송환에 대한 동의는 자주국방의 의지가 동로마에 있는지 조차 의심케 하는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제국 차원의 방침에도 몇몇 도시들 아지무스(Azimus) 같이 전쟁 중 용감하게 훈족을 격퇴했던 곳의 시민들은 그런 방침을 거부하여 로마당국과 아틸라를 난처하게 했다.

훈족은 다종의 이민족들을 지배했다. 아틸라가 사망한 이후 오스트로고트족과 게피다이족 등이 훈족의 중심지를 놓고 쟁패를 벌였다. 그들에게 각기 협력하던 족속들로는 헤룰리족과 루기족과 스키리족 이외에 이미 이동했던 동족의 잔류자들일 수에비족과 알라니족들이 있었다. 훈족이 카르파티아 산맥 동편에서 헝거리 초원으로 이동한 것은 대략 아에티우스의 서로마에서 부상하던 때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미 410년대에 올림피오도로스의 루트에도 그들의 이동했을 수도 있음이 암시된다. 그리고 아틸라와 훈족을 맹주로 떠받칠 이들 게르만족은 훈족보다 빠르게 이곳에 정착했을 것이다. 아틸라 당시에는 훈족의 지배가 오래 되고 예속민도 공로에 따라 해방되어 신분도 높아지던 야만인들 사이의 관습대로 사상 최초로 게르마니와와 스키타이를 동시에 다스린 아틸라 측근 중에는 이민족 출신들이 많았다. 게피다이족의 아르다닉(Ardanic)과 동고트족의 발라미르(Walamir)가 아틸라 생전에 한결같은 충성을 바쳤다. 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이기도 한 에데코는 훗날 스키리족의 왕이 되었으며, 서로마 마지막 황제의 아버지였던 오레스테스는 그 할양에 의해 아틸라에게 신속된 판노니아인이었다. 그런데 에데코와 오레스테스 두 사람은 공히 아틸라의 외교사절이나 비서역을 수행하였다. 당시 이민족이나 로마인으로 채워진 아틸라 궁정의 모습은 역시 외교사절로 그곳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그의 비서 중에는 콘스탄티우스의 경우 아에티우스에 의해 추천된 인물로, 그의 혼사의 중매까지 로마와의 협상에 중요한 의제의 하나로 아틸라가 꽤 고집한 결과 동로마 궁정을 꽤 괴롭힌 끝에  결국 아르마티우스라는 귀족의 미망인을 배우자로 얻어냈다.

평화시 아틸라의 모습은 448년 즈음 로마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을 방문한 프리스코스에 의해 자세히 묘사된다. 일의 시작은 훈과 동로마의 외교협상상의 신경전이 계속되는 중의 일로 크리사푸스가 주도하고 있는 동로마에 에데코와 오레스테스가 찾아온 일로 시작된다. 아틸라에게 급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실로 이것을 위해 정상적 외교활동을 가장한 위해와 위협으란 수모도 아틸라는 꿎꿎이 돈을 위해 참았다. 그는 사절을 통해 '망명자를 송환치 않으면 447년과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지체높은 인물을 협상사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집정관급 인물이 오면 몸소 마중가리라는 아틸라의 호언을 무시하고 얼굴마담으로 막시미누스(Maximinus)라는 고관에게 5명의 송환자와 함께 황제의 더 이상 송환할 망명자가 없다는 뻔한 답을 실려 보냈고 프리스쿠스는 이 막시미누스의 동행 제안을 받고 승락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훈족 아틸라 궁정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국경도시 나이소스까지가서 야만족측의 안내로 다뉴브를 도하한 뒤 14km 쯤 떨어진 아틸라의 거소에 드디어 닿았다. 프리스쿠스에 의해 이미 아틸라에 의해 많이 폐허화되고 버려진 국경의 풍경이 그려졌다. 아틸라는 황제의 서신에 별다른 내용이 없음을 뻔히 꿰뚫어 보고 있는 만큼 사절단이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라고 사절단에게 통보했다. 다른 정황을 보면 아마도 돈이 급한 아틸라가 자신의 만남을 조건으로 추가적인 돈을 요구하려던 것 같다. 프리스쿠스 자신이 스코타스(Scottas)란 측근에게 특히 금전에 관한 솔깃한 제안을  하자 아틸라는 입장을 바꿔 그들을 접견하지만, 예상대로 막시미누스가 황제의 서신을 한번 읽고 아틸라는 망명자를 다 보낼 때야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꾸짖는 것으로서 모든 협상은 끝났다. 이 여행 중 서로마에서 보낸 사절단과도 만났는데 아에티우스와 아틸라 간에도 비슷한 외교문제가 발생하여 있었다.

그러나, 이 후로 그들은 아틸라의 배려로 훈족의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훈족 내의 여러 곳을 아틸라를 따라 여기저기를 방문하여 환대받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아내를 여럿 둔 아틸라의 또 다른 청혼을 지켜봤고 블레다의 미망인 중 하나가 다스리는 마을에서 여왕의 접대를 받기도 하였으며 아틸라의 장자를 낳은 부인과도 만났다. 아틸라를 따라 다니기 며칠 후에는 아틸라의 조금 더 그럴 듯한 목재궁전과 그에 버금가는 2인자 오네시우스의 집이 있는 마을에 도착해 환대받았다. 여기서 포로로 잡혔다 전사신분으로 승격된 그리스말 쓰는 피랍자와 대화했는데 대화내용으로 보면 그는 말기 로마제국의 국가 체제에 대해 아무래도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틸라는 이들 손님들을 위해 두번에 걸쳐 연회를 열었다. 아틸라를 중심으로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으며 각국이나 부족들의 사절들 역시 그러했고 아틸라의 두 아들도 착석했다. 식사대접이 끝난 후 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거나 그의 무용을 예찬하는 노래가 불려졌고 혼혈적 스키타이문화의 계승자 다운 그리스어 등 여러 나랏말이 섞여 있는 광대극의 상연을 하며 초원황제의 권위를 새삼 과시했다. 이렇게 프리스쿠스의 관찰과 여행은 끝이 나고 그들은 무사히 귀환한다. 하지만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당시에는 몰랐던 진짜 동로마제국의 음모에 대해서도 소개하는데 실제 황제-사실은 크리사푸스-의 뜻을 받들던 것은 통역사로 알려진 비길라스(Vigilas)로 그는 에데코를 매수 아틸라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아틸라는 이를 미리 전해듣고도 그가 암살댓가로 제공하려는 돈을 받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