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풍운아 안드로니코스의 모험 서양사


이사키오스(Isaac)의 아들 요한(John)의 동생이자 알렉시오스 콤네누스(Alexius Comnenus)의 孫子(손자)인 안드로니코스(Andronicus)는 당대의 가장 특이한 인물 중 하나라 할 수 있으며 그가 행한 진짜 모험은 아주 독특한 로망의 主題(주제)가 될 수 있다. 황실 핏줄의 세 女人(여인)들의 선택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著者(저자)는 그녀들의 幸運兒(행운아)로서의 愛人(애인)이 힘과 아름다움에서 최적의 비율로 주조되었다는 점과 부드러운 優雅(우아)함에서의 미흡함이 남성적 외모와 큰 신장, 운동선수의 근육과 군인다운 풍모로 메꿔진다는 점을 돌아보게 할 필요를 느낀다. 老年(노년)에서 지킨 그의 건강과 정력은 선천과 훈련의 댓가였다. 빵 한조각과 물 한모금이 종종 그의 유일한 저녁 식사였으며, 자기 손으로 구운 야생수퇘지나 수사슴 맛을 볼 때도 몸소 맹추격 끝에 잡은 정당한 과실일 때 뿐이었다. 무기 다루는 솜씨가 있는 그는 무서움을 몰랐다. 그의 유창한 설득술은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었고,  그 방식은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聖(성) 바울(Paul)의 모범을 따른 것이었으며, 악행에서도 모든 경우에 결단할 가슴과 도모할 머리 실행할 손발을 가졌다. 젊은 시절, 요한네스 皇帝(황제)가 죽자 후퇴하는 로마軍(군)을 따랐으나 小(소)아시아를 지나는 행군 중에 계획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게 그는 山岳(산악)지대를 배회하도록 유혹되었다. 이 사냥꾼이 투르크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진 뒤, 술탄(sultan)의 세력 안에서 싫든 좋든간에 捕虜(포로)로 남았다. 그의 德(덕)이든 惡德(악덕)이든 그의 사촌에게 호감을 주었는데 그는 마누엘(Manuel)과 고락을 함께 했다. 이 皇帝가 자기 조카 테오도라(Theodora)와 공개적 근친상간에 빠진 동안, 그의 누이 에우도키아(Eudocia)는 안드로니코스에게 유혹되어 있었다. 자신의 性(성)과 지체에서 오는 체면을 넘어, 그녀는 그의 妾(첩)이라는 이름을 榮光(영광)으로 알았다. 宮殿(궁전)과 兵營(병영)에서 그녀가 愛人의 품에서 자는 것이 목견되었다. 그녀는 그의 軍事管轄(군사관할)이자 자기 용맹과 무분별의 첫 장이 된 실리키아(Cilicia)까지 동행했다. 그는 대단한 熱意(열의)로 몹수에스티아(Mopsuestia)를 밀어붙였다. 낮에 가장 대담한 攻擊(공격)을 했고 밤엔 歌舞(가무)로 낭비했다. 그리스 喜劇團(희극단)은 그의 從士團(종사단)의 정예를 형성했다. 안드로니코스는 경계하는 적에게 기습당했지만 자기 군단이 뿔뿔히 흩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무적의 槍(창)은 아르메니아軍의 두터운 대형을 꿰뚫었다. 마케도니아(Macedonia)의 皇帝진영으로 귀환에서 마누엘은 공적인 미소와 사적인 책망으로 그를 맞았으나 나이소스(Naissus)와 브라니세바(Braniseba)와 카스토리아(Castoria)의 公領(공령)들이 이 불운한 장군에 대한 보상과 위안이 되었다. 에우도키아는 여전히 그를 따랐다. 한 밤중에 그들의 幕營(막영)이 혈통상의 치욕을 씻으려 안달하며 화난 그녀 형제들에게 급습되었다. 그의 놀라운 精神力(정신력)은 그녀의 충고나 女裝(여장) 따위를 거부하게 해서 침상을 떨치고 나와 무수한 暗殺者(암살자)들을 가르고 길을 나섰다. 그가 처음 배은과 배반을 행한 것이 여기서였다. 그는 헝거리王(왕)과 獨逸(독일) 皇帝와 반역적 교신을 시작했다. 단도를 꺼내 의심스런 시간대에 皇帝의 幕營에 접근하여 라틴人 병사를 가장해 치명적인 敵(적)에게 복수를 맹세하며 경홀히 안전과 도주를 터줄 그의 말의 날쎔을 칭찬하였다. 이 君主(군주)는 의혹을 버렸지만 원정이 끝나자 안드로니코스는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 宮의 탑에 구금되었다. 

수감 중에 그는 거의 12년을 보냈다. 행동에 대한 그리고 쾌락에 대한 갈증이 끊임없이 탈출을 권하였을 가장 힘겨운 속박이었던 것이다. 외로움과 수심 속에서 굴뚝 구석에 부서진 벽돌더미를 발견하여 그 通路(통로)를 넓혀 마침내 어두운 곳의 잊혀진 공간을 발견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전에 위치의 벽돌을 채워 탈출 흔적을 조심스레 지웠다. 보안대가 정기 순찰 중에 조용한 감옥에 놀라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그의 도망을 보고했다. 宮殿과 都市(도시)의 문은 즉각 닫혔다. 嚴命(엄명)들이 속주(屬州)들에 내려져 이 도망자를 환송하도록 했다. 그의 아내는 경건한 행동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같은 탑의 밑으로 갇히게되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한밤중에 그녀는 한 유령 모습을 보았는데 그가 남편임을 알아챘다. 그들은 함께 준비를 했다. 이 비밀 상봉의 결실이 아들 한 명이 되었는데 구금생활의 지루함을 경감했다. 양육 중의 여성으로 인해 간수의 경계가 다소 허술해졌으며 이 捕虜는 드디어 진짜 脫獄(탈옥)을 쟁취했으나, 그가 발견되어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이중 사슬에 묶여 보내졌다. 마침내, 그는 그의 구원의 시기와 수단을 발견했다. 그의 집안 시중인 한 소년이 보안대에 약을 타서 열쇠를 밀랍에 떴다. 그의 친구의 노력으로 비슷한 열쇠가 노끈꾸러미와 함께 감옥 안으로 들여졌다. 안드로니코스는 근면과 용기로 그의 귀중한 도구들을 이용해 열쇠로 문을 열고 탑을 내려와 하루 종일 덤불속에 은신하며 宮殿의 정원벽을 야간에 허물었다. 작은 배 하나가 그를 맞기 위해 정박되어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 집을 찾아 아이들과 포옹하고 사슬을 풀어던지고 날랜 말에 올라 다뉴브江(강) 기슭을 향해 급한 길을 재촉했다. 트라키아(Thrace)의 안키아로스(Anchialus)에서 한 용감무쌍한 친구가 말 몇마리와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江건너 빠른 속도로 몰다비아(Moldavia)의 荒野(황야)와 카르파티아(Carpathia)의 丘陵(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거의 露領(노령) 폴란드의 할리크츠(Halicz)란 소읍까지 달했고 그 때 왈라키아人의 한 무리에게 제지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重犯者(중범자)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의 침착함은 이 위험에서 그를 구했다. 꾀병을 한 후 내려서 그 군단에서 떨어질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땅에 긴 막대를 심고 그의 모자와 웃옷을 걸쳐놓고 숲으로 뛰었다. 왈라키아人들의 시선을 돌린 허수아비를 세운 셈이었다. 할리크츠에서 그는 大公(대공)의 거주지인 키에프로 갔다. 이 치밀한 그리스人은 이지아슬라브(Ieroslaus)의 신임을 얻어냈다. 그의 성격은 모든 토양과 기후를 받아들였다. 이 "야만人"들은 숲속의 엘크와 곰을 추적하는데서의 그의 힘과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이 북방 지역에서 그는 마누엘(Manuel)의 용서받을 자격을 갖췄다. 마누엘은 러시아 君主에게 헝거리에 대한 침략을 지원을 구하였던 것이다. 안드로니코스의 영향력이 이 중요한 사업을 달성시켰다. 그의 私的(사적) 조약이 한편에서는 충실함에 대한 약속에서 서명되었고 다른편에서는 사면의 약속으로 서명되었다. 그가 러시아 旗兵(기병)의 선두에서 보리스테네스江에서 다뉴브江 까지 진군하였다. 분노하면서도 마누엘은 자기 사촌의 상무적이며 방탕한 성격에 공감하였으며 그의 자유로운 용서가 젬린(Zemlin)의 공격 중에 정해졌다. 거기서 그는 이 皇帝의 이어 두번째로 용맹함을 다투었던 것이다.  

추방 뒤 마침내 자유와 귀국을 얻자 마자 野望(야망)이 되살아나게 되어, 이것이 처음에는 그 자신의 마침내는 공공의 불행을 야기한다. 마누엘의 딸은 콤네누스 남계 혈족이라는 우선 계승조건을 가졌는데 이는 대수롭지 않은 장애였다. 헝가리 君主와 그녀의 장래 결혼은 편견을 가진 왕자들과 귀족들의 희망에 어긋났다. 그러나, 忠誠(충성) 서약이 이 잠재적 계승자에 대해 요구되자, 안드로니코스만이 로마라는 이름의 영예를 내세워 이 不法(불법) 약혼을 거부하고 異邦人(이방인)을 들이는 것을 대담히 거부하였다. 그의 愛國主義(애국주으의)는 皇帝에게는 불손한 것이지만 民衆(민중)의 감정에 호소되었다. 그는 황실로 부터의 영예로운 추방으로 두번째로 실리시아 邊境(변경)에 대한 지휘를 맡게 되었다. 키프로스(Cyprus) 세입에 대한 재량권과 함께였다. 이 곳에서 아르메니아人들이 다시 그의 용기와 태만을 끌어냈다. 그의 작전 모두를 훼방했던 같은 叛徒(반도)들은 말에서 내려져 그의 힘찬 창에 살해되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는 곧 더 쉽고 재미있는 정복대상을 발견했다. 皇后(황후) 마리아(Maria)의 자매이자 안티오크(Antioch)의 라틴人 君主 프와티에의 레이몽(Raymond of Poitou)의 딸인 아름다운 필리파(Philippa)였다. 그녀로 인해 그는 자기 임지를 버리고 여름철을 스포츠 게임에 소모했다. 그의 사랑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순결, 명예, 보다 유리한 결혼을 희생했다. 그러나, 이 내적 모욕에 대한 마누엘의 분노가 그의 즐거움에 제동을 걸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 경솔한 공주가 울며 회개하게 두었으며 이판사판의 처지의 모험가들을 모아 예루살렘(Jerusalem) 순례에 나섰다. 그의 출생, 전쟁에서의 명성, 열정이 그를 "십자자"의 챔피언으로 자신을 알리게 했다. 그는 곧 성직자와 왕 양쪽을 홀렸으며 이 그리스 왕자는 페니키아(Phoenicia)의 해변 상에 있는 베리투스(Berytus)의 貴公(귀공) 직을 받게 되었다. 그 이웃에는 젊고 잘생긴 女王(여왕)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모국이면서 같은 집안 출신으로 알렉시우스(Alexis) 皇帝의 증손녀이면서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3세의 미망인이었다. 그녀가 자기 친척을 방문한 후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테오도라(Theodora)가 그의 애정적 유혹의 세번째 희생자여서 그녀의 수치는 전 愛人에 비해 더 공개 추문화되었다. 皇帝는 여전히 복수에 부심했으며 시리아 邊境의 그의 臣民(신민)들과 同盟(동맹)국들이 반복해서 이 망명자의 신변을 잡아 눈을 뽑으려 하였다.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지만 상냥한 테오도라가 위험을 알려와 도주에 동행해 주었다. 예루살렘의 여왕은 東方(동방)에 그의 애첩으로 소문났고 두명의 사생아가 그런 약점의 산 기념비였다. 다마스쿠스(Damascus)는 그의 첫 망명지였고 大(대) 누레딘(Noureddin)과 그의 下人(하인) 살라딘(Saladin)의 인물됨 속에서 이 미신적 그리스人은 무슬림(Mussulmans)人들의 덕을 존경했을 것이다. 누레딘의 친구로 그는 대체로 바그다드(Bagdad)와 또는 페르시아(Persia)의 宮庭(궁정)들을 방문했다. 카스피海(해) 주변과 그루지아(Georgia) 山岳지대를 길게 돌아본 후, 그의 모국에는 대대로 敵國인 小아시아의 투르크人들 중에 최종 정착했다. 콜로니아(Colonia)의 술탄이 안드로니코스와 그의 情婦(정부)와 동료추방자 무리들에게 환영의 의미상의 後退(후퇴)를 제공해 주었다. 그에 대한 감사의 부채를 진 이들은 로마 屬州들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이를 갚았으며 풍족한 가을 수확과 기독교捕虜 없이는 여간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모험記(기) 중에 그 자신은 특히 자기를 邪惡(사악)한 자들의 덫을 피해 긴 추방을 겪은 다윗에 비겼다. 그러나, 그 왕계의 선지자는(아마 그가 덧붙인 것이다) 유대國境(국경)을 염탐하며 아말렉族 사람 한명을 죽이고 탐욕스런 나발(Nabal)의 목숨을 끔찍한 상태에서 위협하는 것으로 족할 뿐이었다. 이 콤네누스家(가)의 王子(왕자)의 일탈은 더 광역적으로 되어 東方 세계에 그의 이름과 종교의 영광을 퍼뜨렸다. 그리스 敎會(교회) 판결로 이 음탕한 방랑자는 信者(신자)들 사이에서 격리되었지만, 이런 파문조차 그가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의 경계심은 공개든 비밀이든 皇帝의 박해를 피하고 분쇄했지만, 마침내 그의 女性 동반자의 체포로 함정에 빠졌다. 트레비존드(Trebizond)의 總督(총독)은 테오도라 신변에 대한 시도가 기습적으로 성공했다. 예루살렘의 이 女王과 그녀의 두 아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으며 그 상실로 추방생활의 따분함에 가슴이 찢어졌다. 이 逃亡者(도망자)는 君主의 발밑에 꿇어앉음으로써 최종사면을 탄원·획득하였다. 君主는 이 거만한 精神의 굴복에 만족했다. 땅바닥에 엎드려 그는 눈물과 탄식으로 그의 과거의 반역의 죄상을 빌었다. 몇몇의 충직한 신하가 그를 목에 은밀히 감은 쇠사슬로 玉座(옥좌)의 발밑으로 끌고가지 않았다면 그는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상한 고행이 조직의 놀라움과 동정심을 일으켰다. 그의 죄들은 교회와 국가에 의해 용서되었다. 하지만, 마누엘의 정당한 의혹은 그의 거주지를 黑海邊 상의 풍족한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폰투스(Pontus)의 小邑(소읍) 오에노에(Oenoe)의 궁정의 근거리내로 못박게 했다. 마누엘의 죽음과 이 少數(소수)派의 소동이 곧 그의 야망을 위한 유리한 場(장)을 만들어 주었다. 皇帝는 열둘이나 열넷 정도의 소년이었는데 정력도 지혜도 경험도 전무하였다. 그의 어머니 皇后 마리아(Mary)는 콤네누스의 家名(가명)에 자신과 政府(정부)를 내버려두었고 황제의 누이인 또다른 마리아(Mary)는 이탈리아인 남편이 카이사르(Caesar)란 칭호로 치장한 후 끔찍스런 양어머니에 대해 陰謀(음모) 드디어는 반란을 일으켰다. 屬州들은 망각된 채 수도가 화염 속에 있고 수개월간 사악함과 약함 속에 평화와 질서의 세기가 전복되었다. 내전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점화되었고 두 당파가 宮殿 광장에서 유혈 전투를 벌였으며 叛徒들은 聖소피아聖堂(성당)에서 포위를 지속했다. 總大主敎(총대주교)가 진실된 성의로 共和國(공화국)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수고하였으며, 가장 존중할 만한 愛國당파들이 한 수호자이자 복수자인 인물을 크게 호명하였는데 안드로니코스의 재능과 심지어 미덕까지도 예찬함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은퇴했던 중에 그는 그의 맹세

"皇家의 안녕과 명예가 위협된다면, 내 모든 세력을 다해 그 잘못을 드러내고 맞서 싸울 것이다."

라는 것의 엄숙한 의무를 생각해 보았다. 總大主敎와 파트리키우스(patrician)들과의 소통은 "다윗의 詩篇(the Psalms of David)과 "바울의 서간(the epistles of St. Paul)"의 적당한 인용으로 양념되었으며, 母國(모국)의 구원의 소리로 부름을 받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다. 오에노에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의 행진 중에, 그의 늘씬한 마차가 불연간에 群衆(군중)과 軍隊에게 부풀려졌다. 宗敎(종교)와 愛國心(애국심)에 대한 그의 言明(언명)이 그의 마음의 진실로 오인되었던 것이며 그의 장엄한 위상을 유리하게 보여줄 외국 의상의 단순성은 그의 가난과 추방생활의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반대 목소리는 그 앞에 쓰러졌다. 그는 트라키안 보스포로스(Thracian Bosphorus)의 海峽(해협)에 닿았다. 비잔틴의 海軍은 그 港口(항구)에서 나와 帝國의 이 救援者(구원자)를 맞아 실어 날랐다. 격류는 불가항력적 큰소리를 내었으며 皇家의 호의의 日光(일광)을 쪼이던 곤충들은 폭풍의 힘 앞에 사라져 갔다. 宮殿을 차지함과 그의 母后(모후)를 감금함 그리고 그녀의 臣下(신하)들을 처벌하고 공공의 질서와 안정을 회복함이 안드로니코스가 기울인 첫번째 주의있는 조치였다. 그 후 그는 마누엘의 墓(묘)를 방문하였다. 구경꾼들이 멀리 떨어져 설 것을 명령받았지만 그가 경건한 기도로 절할 때 다음과 같은 승리 혹은 복수의 중얼거림을 들었거나 그렇다고 생각을 했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오랜 敵(적)인 그대가 두렵지 않소이다. 그대는 나를 지상의 모든 기후를 가진 곳으로 쫓아내 방랑하게 했소. 그대는 일곱 겹의 돔건물 아래 안락히 누워 마지막 승전보에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소. 나는 신속히 그대의 유골의 재와 그대의 후손들을 짓밟을 것이요."

이어진 그이 暴政(폭정) 속에서 우리는 이런 감정들을 그 人間(인간)과 時節(시절)에 전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의 은밀히 생각했을 것을 일부러 입밖으로 내었을 가능성이 극도로 없는 일이다. 그의 집권 첫 나날들 중에, 계획은 僞善(위선)의 좋은 외관 아래 베일을 가렸다. 그것은 群衆의 눈만  속였다. 알렉시우스(Alexius)의 대관은 적당하고 엄숙히 치러졌고 그의 배신적 保護者(보호자)는 자기 손에 그리스도의 聖體(성체)와 聖血(성혈)을 받들고 그의 사랑하는 동료 시민들을 위한 봉사를 위해 죽고 살 준비가 되었노라고 열렬히 선언했다. 그러나, 수많은 그의 지지자들은 침몰하는 帝國이 한 아이의 손에 사멸됨과 로마人은 武力에서는 대담하고 政策(정책)에서는 노련하여 운명과 인류에 대한 긴 시험을 거친 베테랑君主에 의해서만 구조될 수 있으며 안드로니코스의 온화한 거절을 물리쳐 공공 복리라는 짐을 질 수 있게 강제하는 것이 모든 市民(시민)의 의무라 말하라고 지시받았다. 이 어린 皇帝는 그의 목소리가 그런 갈채에 따르도록 한 동료를 세우기를 요청하도록 강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동료는 즉시 그를 최고위에서 내려놓고 은거시켰으며 總大主敎의 경솔한 선언을 뒷받침했다. 그 선언이란 알렉시우스가 그의 保護者에게 맡겨지는 순간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구금과 처형을 행한 다음이었다. 그녀의 명성에 먹칠하고 群衆의 악감정에 불을 지핀 후 이 暴君은 헝거리王과의 반역적 교신을 이유로 이 皇后를 고발하고 조사했다. 영예롭고 인간애를 아는 젊은이인 그의 아들은 이 극악한 행동에 혐오를 보였으며, 세명의 판관이 자신들의 안위보다 양심을 택했다. 그러나, 아첨에 익숙한 법정은 증거를 요구하지도 변호를 청취하지도 않고 마누엘의 未亡人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그 불행한 아들은 그녀의 죽음의 선고에 동의햇다. 마리아는 교살되어 그녀의 시체는 바다에 묻혔으며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여성적 허영에 대한 가장 모욕적 상처를 입고 그녀의 어여쁜 자태는 그릇되고 추하게 표현되었다. 그녀의 아들의 운명도 그리 오래 지연되지는 않았다. 그는 활시위로 교살되었다. 후회와 반성을 모르는 이 暴君은 무고한 젊은이의 시체를 보고 발로 차며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그는 외쳤다 "악당이고, 그대의 어머니는 매춘부며 그대 자신은 한갖 바보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제48장

황제의 동생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며 한때 섬기던 형인 황제를 배신하여 아랍의 군주들 누레딘과 살라딘을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을 섬기던 콤네누스 가문의 안드로니코스의 마지막 종착지는 조선의 세조 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는 형의 사후 조카의 제위를 빼앗는데 성공한다. 물론 그 자신은 동로마제국에서 콤네누스가의 마지막 황제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그의 자손들은 4차십자군 이후 갈라져 나온 트레비존드 제국을 통치했다. 








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