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황제 요하네스 팔라이올로고스(John Palaeologus) 서양사


抑壓(억압)적 後見人(후견인)에게서 解放(해방)된 요하네스 팔라이올로고스(John Palaeologus)는 36년 간을 공적 파멸의 새대 속의 일개 무력하고 부주의한 관중으로 남았다. 사랑이라기 보다 차라리 욕정이 그의 왕성한 열정이 품는 유일한 것이어서, 이 도시의 유부녀들과 처녀들을 품에서 이 투르크의 奴隸(노예)는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不名譽(불명예)를 잊고자 했다. 그의 長男(장남) 안드로니코스(Andronicus)는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아무라트(Amurath)의 아들인 사우제스(Sauzes)와 불법적 친교관계를 맺어 두 젊은이들이 각기 자기들의 부모들의 권위와 생명을 도모하였다. 유럽에서 아무라트 측은 이들의 경솔한 모의를 발견해 소멸시켰다. 사우제스의 눈을 뽑은 후 이 오스만人(인)은 그의 봉신에게 아들에게 쓴 처벌을 하지는 않았으나 공범이나 적으로 대우하겠다는 것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팔라이올로고스는 두려워 복종하였으며 잔인한 예방책으로 그 죄인의 아들인 순진무구한 어린이 요한(John)에게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그 시술은 느슨하고 조잡하게 행해져서 한 쪽은 시력이 유지되었고 다른 쪽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後繼(후계)에서 배제된 두 황가의 父子(부자)들은 아네마(Anema)에 탑에 갇혔고 당시 황제의 次男(차남) 마누엘(Manuel)의 동정심은 황제의 帝冠(제관)이란 선물로 보답된다. 2년 후에 라틴人의 혼란과 그리스人의 경박함이 한 革命(혁명)을 빚어낸다. 두 황제는 앞의 두 父子가 수감자에서 제위로 올려지게 되었던 탑에 갇힌다. 또 다른 2년 후, 파라이올로고스와 마뉴엘은 탈출할 기회를 얻는다. 이는 한 수도사의 마술이나 신중성으로 기획되었는데, 그는 천사 혹은 악마로 번갈아 불리우는 자였다. 그들은 스쿠타리(Scutari)로 도망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은 대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두 개의 비잔틴 黨派(당파)들이 일찌기 카이사르(Caesar)와 폼페이우스(Pompey)가 제국의 패권을 다투던 야심과 적대감을 보여주었다. 로마 세계는 지금 프로폰티스(Propontis)와 黑海(흑해) 사이 트라키아(Thrace)의 한구석 길이 폭 50과 30 마일로 축소되어 잇었다. 남은 콘스탄티노플이 한 왕국의 부와 인구를 여전히 보여준다고는 해도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소 공국만 못한 땅 넓이였다.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제국의 이 작은 파편을 나누는 것이 필요했다. 팔라이올로고스와 마뉴엘은 수도를 소유하도록 된 반면, 성벽없는 땅은 이 앞못보는 부자들에게 양도되었다. 그들은 로도스토(Rhodosto)와 셀리브리아(Selybria)에 주거를 정했다. 황궁의 고요한 잠속에서, 요하네스 팔라이올로고스는 그의 이성과 힘을 소생시켰다. 그는 자신의 선호하는 상속자로 부터 트레비존드(Trebizond)의 꽃다운 공주를 빼앗았다. 이 가벼운 황제가 첫날밤을 치르려 애쓰는 동안 마누엘은 백명의 가장 고귀한 그리스인들과 함께 강압적 요구로 오토만 포르떼(porte)에 보내졌다. 그들은 바자제트(Bajazet)의 전쟁에 영예롭게 봉사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강화하고자 한 계획이 그의 질시를 일으켰다. 그들이 생명을 위협했다. 새로운 사업은 즉시 파괴되었다. 우리가 이 마지막 굴복을 그의 죽음의 이유라 할 수 있다면 팔라이올로고스의 재능에 한 찬사가 될 것이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제64장


<서기 1400년경의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 말년의 일이다. 제국은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하고 요하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는 투르크 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며, 이와 함께 베네치아와 제노아의 패권다툼도 그의 허울분인 제위마저 위협했다. 그의 장남 부자는 반란으로 황제좌를 탈취하다가 긑내는 축소된 제국마저 나누어 가져갔다.







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