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79 로마제국쇠망사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사후 제위는 로마의 명문 거족인 아니키우스(Anicia)가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에게로 돌아갔다(455년). 로마에 궁전같은 호화주택과 제국 전역에 광대한 부를 가진 로마귀족 가문 가운데 이 가문이 으뜸이었다. 공화정 이래로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명멸해갔지만 제정말기에는 권세나 재력에서 이 집안을 능가하는 가문은 찾을 수 없어서 테오도시오스 가문이 남자 계승자의 대가 끊긴 지금 여기서 황제위를 잇게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가문은 일찌기 이탈리아의 참제(僭帝) 막센티우스(Maxentius)에 가담한 일의 속죄로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인 기독교로 일찍 개종하였으며 그 이후로 제국의 민정에 관한 최고위 직인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an prefect) 직이나 명예직인 집정관 직을 계속해서 배출했고 막시무스 자신도 귀족자제로의 특권적 코스를 통해 이탈리아와 로마의 장관직과 집정관직을 역임했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오스 가문이라는 허깨비 같은 이름에 겨우 기대어 명맥을 유지하던 로마제국은 이미 멸망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은 발렌티니아누스 이래로 안정적으로 권좌를 유지한 황제가 없었다는데서도 알 수 있다. 속주들은 이미 야만인들이나 갈로로마인의 손에 넘어가 자립 혹은 반자치를 하고 있었다. 고대사상 로마를 위대하게 빛냈던 정신이란 이 시대에는 이미 세상물정 모를 웃음거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야만왕국들과 제국 사이에 어느 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저울질 하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일화 중에 가장 필자를 웃게 했던 것은 브루군드 궁정에서 있었던 일로 5세기 중엽 로마 제국이 붕괴되리라고 예언한 기독교의 성자에게 그의 예언이 어째서 실현되지 않느냐고 조롱했던 만족에 봉사했던 갈로로만 귀족의 말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한 헛된 환상의 기반이 얼마나 튼튼하고 교묘했던지 통치계급에 속했던 사람마저도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군드 궁정에 있었다면 사실은 이미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 없는 나라의 이야기에서 로마 장군의 일전에 승패에 안도하기도 탄식하기도 하며 제국의 허울뿐인 존속에 기대를 걸 이들은 더 많았겠지만 그런 일전일패 후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그런 안타가움은 헛된 악몽 속에서나 가질 만한 부질없는 생각으로 로마의 혼란과 정치의 타락으로 인한 폭정들 야만인들의 쇄도에 대한 혐오가 부채질한 것이었다. 

따라서, 황급히 막시무스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전황제 발렌티니아누스의 부인과 그들의 황녀와 각기 맺어지도록 했던 것은 제위 그리고 제국의 통치에 대한 취약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반에 대한 좋은 관찰에서 나온 것이었다. 막시무스의 이중의 결혼 강요와 전남편 발렌티니아누스의 시해에 대해 의혹이 더해지자 황후 에우도키아(Eudoxia)는 반달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로마로 불러들이려고 했다고 전한다. 발렌티니아누스와의 사이에 나은 두 딸 중 맏이는 이미 반달왕의 장남 훈네릭(Huneric)과 약혼된 사이여서 이 문제는 반달왕가가 직접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여 그 왕 가이세릭이 노기등등해 했다고 볼 만한 점도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곧바로 전일 알라릭(Alaric)에 이어 두 번째 로마약탈의 수모를 가져 오게 하는 중에 로마인들이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해 6월의 일로 아틸라와의 협상에 이어 오스티아(Ostia)를 점령하고 로마 성벽 아래로 다가온 반달왕 가이세릭 혹은 겐세릭과의 협상도 로마 교황 레오(Leo)가 맡았고 약탈의 광폭함과 잔인함에 대한 제약을 둔다는 조건으로 성문을 열어주었다. 황제는 그 이전에 성난 시민들에 의해 맞아죽어 그 시신이 티베르강으로 던져진지 오래였다. 반달족들은 세계수도의 갖은 진귀한 보화들은 물론 황후와 두 딸은 물론 차녀 플라키디아(Placidia)의 전약혼자 였던 가우덴티우스(Gaudentius) 까지 자신들의 함선에 싣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죽은 막시무스가 로마를 위해 마지막 한 일은 로마제국 말기의 정책이 그랬듯 고트족과의 연대로 반쪽이 되어버린 로마제국의 절반 이상인 갈리아 등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친고트족 인사였던 귀족 아비투스(Avitus)가 협상 차 툴루즈(Toulouse)의 궁정으로 파견되었다가 황제로 추대된다(455년 7월). 갈리아의 일곱속주에 의해 선출된 것이라고도 하는데 고트족의 협력이란 그에 따르는 매력적으로 보일 과실에 의해 로마인에게도 받아들여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때마침 테오도릭 2세는갈로로마계 귀족이었던 아비투스와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앞서 로마황제를 세우는데도 톡톡히 기여하게 된 테오도릭은 로마로 신황제를 보낸 후로는 자신의 비시고트족이 스페인 문제를 담당하게 한다. 당시 반달족이 지중해를 건너간 이후로 스페인은 수에비족의 천하였고 로마의 지배는 북동쪽 모퉁이에 한정되었다. 당시 수에비의 스페인은 팽창의 주역이었던 레킬라(Rechila)가 죽고 그의 아들 레키아르(Rechiar)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부왕 테오도릭 1세가 자기 딸을 449년 그와 결혼시켜 테오도릭 2세에게는 매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아버지의 다음 후계자였던 전임왕이었던 자신의 형을 로마에 대한 반역을 이유로 살해하고 즉위한 테오도릭은 레키아르에게 로마의 이름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다. 레키아르는 이헤 대해 허세로 자신이 툴루즈 궁정 앞으로 쳐들어갈 것이러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피레네산맥을 넘은 것은 로마의 지원을 등에 엎고 프랑크족과 브루군드족을 원군으로 데려간 비시고트였다. 테오도릭은 아스토르가(Astorga) 인근 우르비쿠스(Urbicus)  강가에서 레키아르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기어이 그의 수도인 브라가(Braga) 까지 약탈하였다.  레키아르는 대서양 쪽으로 난 항구도시로 달아났다가 테오도릭 앞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메리다(Mérida) 까지 입성해서 로마에 전과를 헌납했음에도 불구 돌아온 테오도릭은 그가 지원했던 아비투스의 실각에 화가 로마를 향한 복수심에 부심했다.  

한편, 로마로 갔던 아비투스에게 이듬해 정월 그를 위한 송사를 지어 바친 것은 그의 사위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우스(Sidonius Apollinaris)였다. 그의 무능한 통치는 곧 민중의 불만을 사게 했고, 결정적으로 아에티우스의 후예인 리키메르(Ricimer)와 마조리아누스(Majorian) 두 장군의 반발을 불렀으며 공동으로 신황제에 대항케 했다. 당시 리키메르는 당시 이탈리아 해안을 누비던 반달족을 드디어 코르시카에서 물리치고 "이탈리아의 구원자"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대장군 스틸리코와 그 후 로마를 멸후 이탈리아 왕이 되는 오도아케르를 잇는 매개적 인간형인 리키메르는 수십년 전 비시코트왕의 딸과 수에비의 영무한 왕 레킬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여론은 잇단 갈로로만귀족의 통치에 화가 난 상태였고 이것이 리키메르의 야망을 부채질하여 그는 아비투스 황제를 향해 진군했다. 아비투스를 따라온 만족부대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없는 기근상태로 인해 그는 로마의 공공건물 장식을 훼손해 보충해 주어야했는데, 그 결과 민심도 잃고 군대도 잃은 사면초가 상태가 되었다. 리키메르는 갈리아의 원병을 구하고자 갈리아로 달아나던 아비투스를 결국 플라켄티아(Placentia) 인근에서 패배시키고 퇴위 후 그 곳의 주교가 되게 하였다(456년 10월). 이듬해, 아비투스는 원로원의 사형이 선고되어 갈리아로의 도주 중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2인은 차기 황제를 정하는데는 신중하여 457년 한 때 서로마에서 동로마의 마르키아누스(Marcian)를 단독황제로 인정하는 주화가 발행되기에 이른다. 이 해에 마침 마르키아누스가 죽고 후사가 없는 황제로 이내 동로마제국에서도 황제계승문제가 발생했다. 동방대장군 아스파르(Aspar)는 이번에는 자신의 부하 보잘 것 없는 레오(Leo) 황제로 삼게 한다. 그러나, 이 잘못된 선택은 아스파르의 가문이 몰락하는 단초가 된다. 이로부터 게르만족인 아스파르를 견제하기 위해 레오는 제국의 말썽꾼들인 이사우리아족(Isaurian)의 산악민들을 군대에 대거 모집해 자기 세력으로 삼았다.

바로 이 시기에 동서로마에 화해의 기운이 돌았고 리키메르는 친우 마조리아누스를 제위에 올려 상호 황제승인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 갈리아에서는 반발이 잇달았는데 전황제의 유대가 깨진데 실망한 테오도릭이 아를르(Arles)를 공격하고 브루군드족의 수지배를 받아들인 리용(Lyon)이 마조리아누스의 승인을 거부했다. 여기서 스틸리코 이래 야만족의 실질적 제국통치자의 역할을 바꿔서 리키메르는 외정의 문제를 도리어 마조리아누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의 정치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로써 신황제는 드디어 몸소 알프스를 넘었다. 그의 목적은 야만족 등에 분할된 갈리아를 통합해 스페인을 거쳐 수년간 말기적 로마체제마저 위협하는 독자세력으로서의 반달족 세력을 뿌리뽑는 것이었다. 때마침 갈리아 대장군 아에기디우스는 왕년에 신황제와 마조리아누스와 같은 작전을 수행했던 전우로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나르본 속주에 침입하며 아를르를 포위공격하는 테오도릭을 방어하고 있었다. 마조리아누스 자신은 리용에서 부르군드 수비대를 몰아내고 로마의 지배를 재확립했는데 이 부르군드군은 테오도릭의 스페인 원정에 참여한 후 그에 의해 귀환 중에 신임황제와 맞서고 있었다.** 노한 마조리아누스가 인상된 세금을 이곳에 매겼지만 때마침 장인의 몰락 후 고향 리용에 낙향해 있던 시도니우스의 아첨에 다소의 감면 혜택을 주었다. 곧이어 아를르 쪽으로 이동해 고트족을 물리치고 새로 획득했던 영토에서 밀어내고 다시 고트족의 영역을 아퀴타니아(Aquitania)에 국한시켰다. 

<마조리아누스의 활약상과 그의 통치하 봉합된 모습을 보이는 제국의 지도>


이제 서로마가 당면한 마지막 과제인 반달족 정벌을 위해 스페인으로 가서 그곳을 평정했으며 반달원정 준비에는 제국내 모든 만족들까지를 비롯한 전제국적 일치단결된 협력을 얻어냈다. 발렌티니아누스 사후 달마티아에서 반독립상태로 있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 마저 그 중 하나였는데 즉시 시칠리아로 군대를 보냈다. 그는 스페인의 카르타헤나(Carthagena)에 새로 건조한 함선을 비롯해 무려 300여 척의 배를 집결시켰다. 이제 반달족의 멸망과 서로마의 통일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분오열된지 이미 오래인 로마세계를 이렇게 단시간내에 통합한 황제의 능력은 군사적이기 보다는 그의 시민적 복리를 생각하는 로마공화국의 초심으로의 복귀를 연상케 하는 민정에서의 주민들의 기대 때문인 것도 같다. 

기번이 그의 신칙법(Novellae Maioriani)들을 조사 열거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일차적으로 제국의 무거운 세금을 경감시키려 면책 등을 허용하였다. 당시에는 관리들에 의해 이런저런 중복 징수 등으로 인해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는데 이런 것들을 부정한 세금으로 보았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세제개혁 이래 세금 사정과 징수에서 문제화 된 방식을 지양하고 더 오랜 고대적 방식으로 회귀 속주 총독의 역할을 부활시켰고자 했다. 다음으로는, 의원들이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이탈해가는 각 지방의 자치의회 역시 강화시키고자 했다. 각종 부패와 폭정을 일삼는 관리에 대한 시민 보호역의 데펜소르 시비타티스(defensor civitatis) 직도 부활시켰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개혁은 황제의 외정 상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이민족의 영토가 된 아프리카를 회복하려고 집결시켜둔 함대가 제국내 공모자들***과 반달족에 의해 파괴된 것이었다.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 준비한 계획이 좌절되자 황제는 마지못해 반달왕 가이세릭과 강화하여 그의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 까지의 영유를 인정해야 했으며 서로마의 완전한 재회복은 또다른 준비기간을 요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까지나 닿을 듯 한 목표로 보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좌절되어 영구히 실현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앞서 보인바 처럼 황제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본거지는 이탈리아였는데 리키메르가 동료의 제거를 준비하는 것도 모른 채, 황제는 자신의 부대를 해산하고 무장해제한 채로 로마를 향했다.

마조리아누스가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리키메리는 정변을 획책하여 그를 퇴위시켰다(461년). 귀족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만족부대를 선동해 토르토나(Tortona)에서 그를 체포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노령의 세베루스(Severus)라는 원로원의원을 허수아비 황제로 삼아 이탈리아를 전제하였다. 동료 마조리아누스의 죽음은 병사(이질:dysentery)로도 공포된 듯 한데 이후의 잦은 황제의 제거와 의문의 죽음과 그에 얽힌 기만은 그의 통치술의 불가결의 필수요소였다. 그 동안 함대가 없다시피한 이탈리아 해안은 일부지역을 제하곤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반달족 함대의 약탈에 노출되었다. 가이세릭은 이탈리아 해안이라면 그 어디든 바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겠다며 배에 올랐다. 그는 "바람이 그 주민들이 신성한 정의를 어지럽히는 죄많은 해안가라면 어디든 데려다 줄 것이다"고 큰소리 쳤다.

마조리아누스가 이룩한 모처럼의 통합제국도 무위로 돌아가 할거가 고착화되었다. 아에티우스가 심어놓았던 갈리아의 아에기디우스(Aegidius)와 달마티아의 마르켈리누스는 이 만족 지배의 로마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자립을 재개했다. 이들은 아에티우스 살해 후 로마에 등을 돌려있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마조리아누스파들은 리키메르의 타도를 위해 달마티아나 갈리아로부터의 침입도 준비하고 있었다. 

반달족은 그 간에 납치되었던 훈네릭과 결혼한 에우도키아(Eudocia) 외에 모녀 황후 에우도키아(Eudoxia)와 플라디키아(Placidia)를 동로마에 돌려주었다. 이 후로 가이세릭은 플라디키아의 부군인 올리브리우스라는 로마귀족이야 말로 정당한 황위계승자라며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해안을 공격약탈하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만족실권자 리키메르 자신도 수년간의 고립 속에서 결국 동로마제국의 간섭과 우호를 끝내 물리칠 수 없었다. 때마침 세베루스 황제가 의문스럽게 여겨질 죽음을 당해 공위가 되었고 동로마에서는 새로운 통치자로 전황제의 사위인 안테미우스(Anthemius)를 보내왔다. 이 인물도 그가 동로마황제에 의해 손아랫사람처럼 세워졌다는 점을 제하면 마조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로마가 코앞에 둔 종말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이미 만족과의 전투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운 그는 사실 동로마의 황제였어야 했을 인물이었는데 실제로 황제위 계승 1순위의 인물이었으나 아스파르의 농간으로 그 기회를 잃은 듯했다. 레오 황제는 이 거추장스런 경쟁자를 서둘러 서로마로 보냈고 안테미우스 자신도 리키메르에게 딸을 보내어 로마를 재흥시키려는 의욕적인 출발을 했다(467년). 마조리아누스 이래의 과업이던 아프리카 원정이 동로마의 협조로 다시 계획되었다.   

사실 동로마라고 완전한 평화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469년 오스트로고트족에게 밀려난 훈족이 아틸라의 아들 뎅기지그(Dengizich)의 영도하에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는데 이것이 격퇴되었으며 뎅기지그의 머리가 수도경기장에 내걸렸다. 그의 동생은 차라리 멀리 달아나가 안전을 도모했다. 안테미우스 황제와 한 때 동로마 황제가 되는 바실리스쿠스(Basiliscus)도 비슷한 시기 쳐들어온 훈족이나 오스트로고트족에 대해 전공을 세운 바 있다. 페르시아와의 협상과 충돌도 계속되었다. 

일단 훈족 등의 위협이 종식되어서 인지 레오 황제는 쇠락하는 제국으로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막대한 전비를 한꺼번에 한곳에 집중 지출하면서 엄청난 함대를 건설했고 일차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이집트에서 모집된 군대를 싣고 드디어 트리폴리(Tripoli) 해안에 상륙 인근 도시들을 석권했다. 한편, 다시 한번 동서로마에 화해에 힘을 보탠 마르켈리누스가 로마를 거쳐 원정에 동참 샤르데냐에서 반달족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또한, 레오의 처남인 바실리스쿠스(Basiliscus)가 트라키안 보스포로스에서 카르타고 인근 해안에 상륙했으며 헤라클리우스의 군대뿐 아니라 마르켈리누스도 가담했다. 멸망이 눈앞에 있는 상태에서 반달왕은 항복을 위한 닷새의 여유를 달라고 애걸하면서도 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도모했다. 이번에도 함대가 집결한 틈을 타 화공을 도모했는데 가연성물질이 가득든 배가 어두운 야간 중에 의심없이 연합함대를 덥쳤고 패배한 로마군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특히, 시칠리아로 후퇴했던 마르켈리누스는 그곳에서 암살당하지만 달마티아의 독립성은 그의 조카 네포스(Nepos)에 의해 계속 유지된다. 이미 프랑크족의 지지를 받던 아에기디우스 역시 사망하여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Syagrius)에게 계승된 상태였다. 거의 동시에 비시고트왕국 내에서도 에우릭(Euric)이 형 테오도릭을 제거하고 로마에 대한 충성을 재고하고 팽창정책을 시작하였다. 이 때 갈리아 귀족들도 동요하여 아르반두스(Arvandus) 같은 장관의 경우는 고트왕정에 동로마의 그리스인과 손잡지 말라는 충고와 더불어 브루군드족과 고트족 사이에서 갈리아를 분할하라는 청을 한 것이 발각되어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황제를 칭하지 않는 이상 반역죄가 아니라는 괴이한 자기변호에도 불구 유죄판결 후 감형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는 한편 동로마에서는 실질적 집권자였던 아스파르가 자기집안의 하인에 불과했던 레오에게 숙청되는 일이 벌어진다(471년). 이 과정에서 이사우리아인들과 연합한 레오는 타라시코디사(Tarasicodissa)라는 이름의 이사우리아인을 자기 딸 아리아드네(Ariadne)와 결혼시켜 그 유대를 더 밀접하게 했었다.**** 기번에 의하면 반달원정의 실패조차도 아스파르의 적과의 내통 탓으로 돌려진 것 같다. 물론 이 같은 일은 서로마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되는 통상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야만족 실권자 리키메르가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훌륭한 로마인 황제를 다시 합번 뒤엎었다. 여기서 잠시 한 주교를 중재역으로 잠시간의 평화와 타협이 유지되는가 싶더니 밀라노에서 전력 보강이 이루어지자 마자 그는 갑자기  밀라노에서 로마로 쳐들어가 황제를 살해했다(472년). 당시 이탈리아가 남북으로 지지가 갈린 가운데 로마 민중은 황제를 지지했고 만족부대들은 오도아케르를 비롯 리키메르를 도운 이 내전은 9개월을 갔다. 그 전에 갈리아를 구하러 더났던 그의 아들 안테미올루스(Anthemiolus)가 아를르에서 비시고트족과 용감히 사우다 패해 전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리키메르는 새로 세운 황제 올리브리우스(Olybrius)*****와 함께 바로 그 해에 사망했고, 후계자는 누이와 부르군드왕 사이의 아들인 군도바드(Gundobad)였다. 군도바드는 새 황제로 글리케리우스(Glycerius)를 세웠으나(473년), 동로마 레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달마티아의 네포스(Nepos)를 서로마황제로 삼았다으며 레오 자신이 이듬해 정월에 사망한다. 동로마의 레오가 죽고 그의 이사우리아인 사위가 제노(Zeno)가 곧 죽을 어린 아들과 함께 제위에 올랐다. 네포스는 레오의 후계자 제노의 지원을 바탕으로 로마로 들어와 글리케리우스를 살로나(Salona)의 주교직으로 은퇴시키고 제위에 오른다. 그러나 제노 마저 선제의 황후와 그 동생 베리나와 바실리쿠스에게 일시 제위를 잃고 쫓겨난다. 이런 틈을 타 네포스에게 대장군직에 등용된 오레스테스(Orestes)는 네포스를 라벤나에서 달마티아로 쫓아내고 드디어 자신의 어린 아들을 로물루스-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제위에 앉힌다(475년 10월 31일).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였다. 오레스테스는 판노니아인으로 그곳이 아틸라에게 양도될 때는 아틸라의 충직한 신하가 되었으며 그의 훈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의 만족군과 함께 흘러들어갔다 고위직에 올랐던 것 같다. 야만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네포스에게 반란을 부추기고 그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그는 거부했고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로물루스(Romulus)였다. 도시국가 로마의 첫 창건자이자 왕과 같은 이름이다. 도시를 세울 때 로물루스와 레무스 두 형제가 새점 내기를 하여 열두마리를 봐았다고 거짓으로 말한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이기고 도시를 차지했다는 오랜 전설이 전하는데 이 도시건설이 어느 덧 1200여년 전 일이었다. 흔히 열두마리의 새는 도시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서로마의 대장군은 자신이 제위에 올릴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는지 자신의 아들을 허수아비 황제로 올렸다.


<고대 로마의 중심 포로 로마눔>


이듬 해 게르만족 용병과 그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의 불만과 그로 인해 야기된 불화는 만족군의 요구를 증가시켰다. 이탈리아 땅의 3분의 1을 보수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오레스테스는 이를 거절하고 티키눔(Ticinum)을 지키다 그 함락 후 처형되고 동생 파울(Paul) 역시 라벤나 인근에서 살해된다. 오도아케르는 은거한 황제를 위해 연금을 제공하기로 하고 거추장스런 황제직을 폐지하기로 했다. 복위한 동로마황제 제노의 명목상 신하로 파트리키우스란 겸양적 칭호에 만족하고 스스로는 첫 이탈리아 왕(King of Italy)으로 행세한다. 외적인 절차에도 신경을 써서 황제가 퇴의 의사를 원로원에 밝혔고 원로원의 의사가 동로마에 전달되게 햇다. 그는 제위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자청하여 동로마황제에게 서로마황제의 휘장들을 바쳤다. 동로마에 대한 존경과 자주 이탈리아 및 서로마 주권자 선택에 간여한 그들이 무서워서라기 보다도 이제 그런 값비싼 자리가 더 이상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비잔틴제국이 로마제국을 계승했다고는 하지만 어떤 야만인 조차도 여러모로 축소되고 많은 악덕과 악폐를 가진 그 제국을 로마제국과 같은 경외의 눈으로 본 자는 어차피 없을 것이었다. 물론 로마는 전쟁에 져서 망한 것이 아니라 오도아케르가 단지 제위를 거부하고 왕이라는 칭호에 만족한 데 지나지 않은 만큼 당장의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원로원도 상당기간 존속되었고 집정관도 뽑혔다. 또한 후대에는 호민관 같은 이름으로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이미 제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동서로마의 분리가 테오도시오스 사후 결정적으로 된 이후 이탈리아로 축소화된 틈을 타 원로원의 권위가 일시 황제위 결정에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까지 보이게 했으나 사실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제국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필자가 그 동안 로마멸망까지에 이르는 로마사를 공부하고 글도 쓰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주로 쇠퇴하는 시대여서 그런지 의로운 자의 정당한 이상이 너무나 쉽게 꺽이고 때로 역사가 깊이 뒷걸음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기번도 그런 점에는 동의하는지 거기에 대해 이런 결론으로 로마제국쇠망사의 전반부 즉 로마제국의 멸망에 이르러 그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런 인상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진보 전진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과 전쟁 그리고 상업 또 종교적 열정의 첫 발견이 신구세계(新舊世界)의 야만인들 중에도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선물을 뿌리고 있다. 그것들은 중단없이 확산되어 왔으며 결코 상실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까닭에, 우리는 세계의 모든 시대가 진정한 부와 행복 그리고 지식 나아가 아마도 인류의 덕성까지도 증대시켜왔고 또 여전히 증대한다는 즐거운 결론 앞에 침묵할 수 있다. 

도덕성이 진보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그것도 계속해서 증대된다는 말은 이성적인 입장에서 더구나 쇠망사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아온 입장에서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역사에서 너무나 비관적인 전망이나 생각을 품게 한 것은 인류나 역사 속의 각 개인들이 적어도 개인이든 사회든 진보나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간과하고 제대로 짚지 못한 탓이 아닌가 하는 부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 <메로빙거 세계, 패트릭 기어리 저, 이종경 옮김, 53쪽>
** <Sidonius Apollinaris and the fall of Rome, J. D. Harries>
*** 그 수장은 리키메르였을 것이다. 반달원정을 위해 대기하던 시칠리아의 마르켈리누스 군대가 사전 철수한 것도 그가 스키타이 출신 용병을 매수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스키타이 출신이란 오스트로고트족을 말한다. <Priscus 38, Blockley trans.> 
**** 둘째 딸 레온티아(Leontia)는 처음 아스파르의 아들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이것이 종교적 반발과 소동을 일으켰다. 결국 그녀는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아들과 결혼한다.
*****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차녀 플라키디아와 결혼한 올리브리우스는 반달족이 지원하고 있었다. 레오에 의해 그는 중재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왔던 듯 싶다. 










덧글

  • DreamersFleet 2014/12/12 00:24 #

    ****** 도덕성이 진보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어떤 현인(賢人)은 이렇게 말하긴 하네요. 증명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야 말로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랍니다. 하긴, 배루른 돼지만의 지상의 목표로 아는 사람과 그런 사회라면 모를까.

    노래하나 들읍시다. http://youtu.be/xKvGVVpj9jQ
  • 2014/12/22 11:1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22 12: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기번 2014/12/27 00:36 # 삭제

    헤겔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통해서 이교적인 전통이 붕괴되고, 기독교의 열정이 시대를 지배하면서 서구 문명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이성적인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이 아닌 종교가의 신앙과 열정이 현대 서구문명을 창조했다는 거죠.

    저도 이 말이 공감가는 게...기번도 이슬람 제국이 로마제국보다 더 위대했다고 평가한다는 사실 때문이죠.
    고대 로마는 지중해라는 작은 바다 안에 갇힌 세계에 불과했지만, 이슬람 제국은 신앙의 열정으로 벌인 정복전쟁을 통해서 중세 시대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문명권을 이룩하죠.
  • 기번 2014/12/27 00:38 # 삭제

    드리머님도 중세 이슬람 제국의 강대함과 번영을 아실 겁니다. 이슬람 제국의 발전과 번영을 목도한 유럽인들도 이슬람의 종교 정복전쟁을 모방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됩니다.
    즉 이 말은 다신교보다 유일신교가 시대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거죠.
    저는 그래서 기번이란 인물의 위대성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 DreamersFleet 2014/12/31 22:45 #

    어쨌든 이교로마는 망하고 기독교 로마와 그의 계승자들의 시대를 관통해서 역사가 발전한 것은 맞겠습니다.

    다만, 기번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것이라, 게르만(야만)과 기독교를 로마를 쇠망의 원인까진 모르겠으나 그 징후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기본적입니다.
  • 기번 2014/12/27 00:41 # 삭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나나미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면서 조소한 반면..기번은 기독교와 이슬람 두 유일신교의 대결과 화합을 통해서 현대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보죠.
    세상은 평화보다 경쟁을 통해서 더 혁명적인 발전과 진보를 이룰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영원한 대결을 벌이는 두 유일신교 때문에 현대 서구문명의 세계지배가 가능했다는 결론을 보면서 놀랐죠!
    결국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없는 거겠죠!
    신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성경에 나옵니다! ㅎㅎㅎ
  • DreamersFleet 2014/12/31 22:46 #

    "기번"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도 알라신의 뜻이다"란 말씀이 생각나네요.
  • 기번 2015/01/01 15:24 # 삭제

    어쨌든 이교로마는 망하고 기독교 로마와 그의 계승자들의 시대를 관통해서 역사가 발전한 것은 맞겠습니다.

    다만, 기번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것이라, 게르만(야만)과 기독교를 로마를 쇠망의 원인까진 모르겠으나 그 징후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기본적입니다.// 기번은 계몽주의자라서 종교의 광신, 신비주의에 대해서 냉소, 조소하는 경향이 강했죠. 그러나, 서로마 제국 총괄편에서 이렇게 평합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변모함으로써 현대 서구문명이 탄생했고, 번영이 이뤄지고 있다! 고 말이죠.
  • 기번 2015/01/01 15:26 # 삭제

    어짜피 인간이 하는 일은 공적보다 실수가 더 많다고 하죠. 기독교도 그런 실수를 많이 했음에도 현대 가장 위대하고 번영하는 문명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신의 위대성을 드러낸다고 기번이 평가했죠.
    인간이 아닌 신이 이룬다는 믿음인 거죠!!
  • 기번 2015/01/01 15:29 # 삭제

    "기번"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도 알라신의 뜻이다"란 말씀이 생각나네요 // 기번은 이슬람교의 쇠퇴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죠. 서구 기독교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와 발전을 위해서 애쓴 반면, 이슬람은 종교의 광신과 맹신성에만 빠져서 서구의 르네상스 과학혁명이 일어나자 쇠퇴하고 말았다..고요.

    기번은 이슬람의 위대성은 종교의 열정과 광신에서 나왔지만, 기독교처럼 관용과 중용의 미덕을 이루지 못해서 결국 기독교 문명에게 밀려서 쇠퇴했다고 평해요.
    기번의 위대성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 기번 2015/01/01 15:32 # 삭제

    서구 신학자들은 이슬람은 기독교의 이단종파라고 평가합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대결을 벌여 온 사실은 한국인이 잘 모르는 사실이죠.
    어떤 미국학자는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를 심판하기 위해 신이 이슬람을 도구로 썼다는 주장도 하죠.
    이슬람이 계시록에 나오는 아바돈이란 주장도 있어요.
  • 기번 2015/01/01 16:32 # 삭제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유대인,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이죠. 서구학자들은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을 이삭과 이스마엘의 영원한 대결로 이해합니다.
    누가 진정한 야훼의 사도이자 후계자인지를 놓고 종말 때까지 대결을 벌인다고 예언했죠.
    정통과 이단의 영원한 대결로 보기도 하죠.
  • DreamersFleet 2015/02/19 18:51 #

    여기 쓰신 '기번'님 말씀은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기번의 우호적 생각은 게르만 야만족을 순화시킨 것이고 그들의 무모한 종교적 열정으로 십자군 같은 이교도 이문화권에 대한 전쟁을 통해 미래 발전을 위한 자극을 받은 정도로 못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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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