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논쟁과 훈 제국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74 로마제국쇠망사


동로마 궁정에서는 여전히 황제가 어릴 때나 장성했을 때나 환관의 영향력이 컸다. 안티오코스(Antiochus)라는 인물은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 이래 신임을 획득해 테오도시오스 황제의 교육을 맡아 파트리키우스의 칭호까지 받고 재위초기 영향력을 유지하다 421년 쯤에 권력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칼케돈 교회의 사제로 쫓겨났다. 황제는 그 직후 환관은 파트리키우스 칭호나 원로원 의원 신분을 얻지 못한다는 칙령을 내렸지만 그 후로도 크리사피우스(Chrysaphius) 같은 인물들이 환관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런 환경에 둘러쌓인 테오도시오스는 유약함으로 흔히 특징지워지며 대외 문제 훈족에 대해서 특히 그러했지만, 황후 에우도키아를 얻은 이후로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문화정치를 한 모양이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했다는 세평을 받으며 민중의 호의를 얻었던 이집트 출신의 키루스(Cyrus)가 수도장관과 제국의 장관으로 등용되었던 것도 황후의 후원에 따른 것이었다 한다. 441년 쯤에야 황제의 질투로 말미암아 해임되어 유배를 가서 주교가 되었는데 대략 황후의 실권과 비슷한 시기이기도 하며, 공히 그 배후에는 크리사피우스의 책략이 있었다. 그녀의 권세의 절정을 보여주었던 것이 438년 예루살렘 순례인데 안티오크에 들려 공공욕장의 재건을 위해 많은 기부를 하고 시 의사당에서 호메로스를 인용해 그리스임을 자랑하는 그리스식 연설을 행하였으며, 그 댓가로 의사당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성지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기부를 하고 수도로 돌아올 때 많은 성유물들을 가져왔다. 그녀의 친구 키루스는 이교성향의 아카메디학원에 맞설 기독교대학을 설립했는데 그 부산물로 테오도시오스 법전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비록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으로 일찌감찌 아카데미는 문을 닫고 고대세계와 함께 사라졌지만, 이 대학은 14세기까지 존속해서 그리스 학문을 근근히 전수하였다. 

테오도시오스는 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은 황제이기도 했다. 섭정인 그녀의 누나 풀체리아가 독실한 기독교도였고(사실상 독실하며 처녀성을 경건히 지치는 수녀라는 것이 그녀의 더없는 정치적 자산이었음) 아내 역시 개종한 후로는 그러하였던 만큼 이 시대에도 기독교에 관해 중요한 사건들에 황실 차원의 개입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파의 단죄 역시 그의 치세에 있었던 일 중의 하나다. 동방기독교 가운데 아시아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전파된 종파가 있는데 이것은 서방에서 이단시 되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파의 일종이다. 페르시아제국을 통해 널리 전파된 이 종교는 오늘날에도 시리아의 기독교에 남아있고 인도에도  드물게나마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중국에서도 명조 이전까지 기독교가 존재했는데 발견된 경교 비석에는 그들의 로마 유래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진(大秦)이란 국호가 함께 있다.** 네스토리우스가 최초로 단죄된 것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Council of Ephesus)였고 이 결정은 451년 칼케돈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도 재확인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요 적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聖) 키릴루스(Cyril)였다. 그는 바로 전임자였던 몰염치한 테오스필로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 양자 모두 이단에 대해 단호한 사제들이었다. 사도좌 주교라는 막강한 권력을 잡자마자  두 사람 모두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s)와 유대인 등의 박해에 나섰다. 키릴루스는 특히 총독 오레스테스(Orestes)와 충돌하였다. 나아가 그는 그의 지지자들이 고대 여류 이교지식인이었던 히파티아(Hypatia)를 잔혹하게 살해하였는데서 이 종교인의 냉혹성은 보여질 수 있다. 오레스테스가 지지자들의 공격에 전차상에 부상을 입자 그 주동자 한명을 공개 고문해 죽게 하는 등 총독과 주교의 대립이 심해졌을 때 기독교인들은 총독의 태도의 배후로 이 여인을 지목해 희생양 삼아 사지를 찢어 불태워 죽였다. 이 사건은 키릴루스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대한 세인들의 혐오감을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기번의 설명에 의하면 시리아교단의 일원인 수도사 네스토리우스가 동방제국 최고사제로 초빙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당시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의 추방과 죽음이래 비잔틴 총대주교에게 등을 돌린 민심을 돌려놓는 노력의 과정에서 아티쿠스(Atticus)의 온건하고 성실한 노력을 이을 참신한 사람이 필요했었다.*** 테오도시오스 황제는 뛰어난 설교술과 독실함에 대한 품평을 전해 듣고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군중들로 둘러쌓인 가운데 황제면전에서 그가 한 연설은 아티쿠스와 사뭇 다른 경망스런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폐하! 이단들이 일소된 지상(地上)을 제게 주십시오. 대신 저는 천국(天國)을 폐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단을 멸하게 저를 도우소서. 그러면 저도 페르시아를 멸하는 데 폐하를 돕겠습니다."

마침내 키릴루스가 앙숙인 네스토리우스에게서 꼬투리를 잡는데 그것은 그가, 고지식하게도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그의 짧은 지식 때문으로 돌렸지만, 자기 교단의 소신을 지켜 마리아 테오도코스(Maria theodocos) 곧 신의 어머니라는 말을 거부한다고 공언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면 모를까 신성의 어머니란 참된 기독교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말었다. 네스토리우스의 환경에서는 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이런 고집은 정통교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구분한 것이라고 볼 소지가 있었다. 이에 로마주교의 지지 속에 키릴루스가 이 문제에 대해 에페소스 공의회를 열었다. 동로마 황제 부처와 안티오크 대주교 요한의 지지를 받았지만 약간은 미지근한 것이었고, 키릴루스은 성공적으로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 물론, 요한도 자파의 반대공의회를 열어 키릴루스를 단죄했다. 황제는 무턱대고 당장 공의회의 결정에 손을 들어주지 않고 키릴루스를 구금하였으며, 네스토리우스도 사직하고 자신이 있던 안티오크로 은거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를 사막 한가운데로 유배보내고 저작들을 불사르며 심지어 같은 이름의 아이들에게 다른 세례명으로 다시 세례받도록 하게 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제국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이 논쟁에서 이겼던 것으로 보였던 이집트교단의 승리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과 시리아교단의 갈등이 이 사건의 뒤에 있었다면, 이집트교단은 반대쪽 극단으로 보였고 그리스도 안의 하나의 본성만을 강조했던 그들은 점점 단성론(Monophysitism)이라는 딱지와 함께 이단의 의혹을 받았으며, 테오도시오스가 죽고 풀체리아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될 때 그 오류가 확정되었다. 풀체리아는 20여년 전의 (1차)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키릴루스를 지지해 궁정이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는데 큰 역할을 했었었다.  

당시 기독교계의 논쟁의 주제는 삼위일체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로 넘어가 있었다. 서로마에서 네오토리우스 단죄 직전에 있었던  펠라기우스(Pelagius) 논쟁도 그와 관련이 있다. 네오토리우스 자신도 펠라기우스파 망명자들을 보호한 바도 있고 공의회에서도 같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펠라기우스는 브리타니아의 수도사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을 읽으면서 그의 인관관에 자유 의지의 위치에 대해 깊은 의혹을 품고 그에 맞서는 자기 설을 설파하면서 새로운 종파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로마의 난리를 피해 팔레스타인 등을 떠돌던 펠라기우스와 그의 동료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논쟁을 벌였으며 아프리카 공의회를 여는 등으로 그들을 단죄하려 했었다.

한편, 서로마에서는 갈리아의 대장군 직을 얻은 아에티우스는 이미 포에데라티(foederati)라는 지위로 합법적으로 정착한 여러 게르만족들의 반란과 확장욕을 제압하고 로마의 지배를 재확립하고자 했다. 고트족의 테오도릭(Theodoric)을 원영역으로 돌려보낸 후 프랑크족을 물리치고 로마 국경을 확보했다. 431년에는 라에티아(Raetia)와 노리쿰(Noricum)에서 같은 일을 수행했다. 이 즈음 스페인에서 수에비족의 침략을 받은 주민 대표인 주교 히다티우스(Hydatius)의 구원요청을 받았으나 그의 개입은 신속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브리톤족이 픽트족과 스콧족의 약탈로 괴로와 할 때의 구원 요청을 갈리아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다.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기 서서히 바가다우에(Bagaudae)라는 농민반란세력의 할거가 시작되었다. 아에티우스는 어쨌든 이런 갈리아의 문제들을 다른 속주의 희생 속에서도 해결해 냈고 440년 로마로 일시 귀환하여 환영을 받았다.

이 때 훈족은 역시 로마에 맞선 훈제국의 건설에 나섰다. 최초로 흑해 인근에서 알라니족과 고트족을 밀어내면서 그 반동으로 고트족에게 동로마군이 참패한 하드리아노플 전투을 야기한 것으로 역사상 등장한 훈족은 이제 대헝가리평원(Great Hungarian Plains)에 정착하였다. 훈족의 민족이동의 고고학적 증거는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모양으로 그것은 역시 훈족이 대규모 이동을 했다기 보다는 기존 민족 즉 고트족과 게피대족 등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 같다. 아틸라(Attila)와 블레다(Bleda) 형제가 삼촌 루아****에게서 434년 왕위를 계승해 공동왕이 되었는데 이 시기 훈족의 패권 확립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후대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의 소재가 된 브루군트족의 멸망에 관한 사건이다. 과거 로마의 허수아비 황제를 세웠던 브루군트족은 호노리우스 정부와 화해하여 이미 점령한 라인란트(Rhineland) 내의 영지를 보유하다 인근 상벨기카 속주를 침입했고 훈족 용병을 동원한 아에티우스가 이를 물리쳤다. 437년 수만의 고트족 병사들과 함께 전사한 군다하르(Gundahar) 왕이 훈족왕 에첼에게 멸망당하는 <니벨룽겐의 노래>의 군터이다. 여기 나오는 사건과 주제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당시간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여러 시대에 걸쳐 모아 혼합해 각 인물을 창조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나오는 지크프리트의 경우는 북구 전설속의 인물의 계보를 잇는 자이며,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훈족왕과 재혼해 전 남편의 원수를 갚는 크림힐트는 로마궁정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누이인 호노리아와 비슷한 면이 있다. 호노리아 역시 궁정의 권력 암투에 휘말려 아이까지 낳은 애인을 잃고 아틸라에게 약혼반지까지 보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좀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고 할 법한 원형적 작품은 이 보다 이른 시기의 <아틀리의 노래(Atlakviða)>인데 여기서는 군터에 대응하는 군나르(Gunnarr) 브루군트왕과 그 동생 회그니(Högni)-니벨룽겐의 노래의 하겐(Hagen)-를 죽인 복수를 그들의 누이인 구드룬(Guðrún)이 자기 남편인 아틀리(Atli)에게 행한다. 아에티우스와 브루군트의 대립의 부수적 참여자로서 훈족이 아닌 이들 문학에서 보이는 훈족과 브루군트족의 직접적 대립은, 구체적이진 않지만 다른 사료에도 종종 암시가 있다.***** 1부의 지크프리트의 살해에 이어 2부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하겐의 죽음은 아틸라 즉 에첼이 그의 죽음에 대해 "일찌기 전장에 들어 방패를 쥔 자 중에 가장 뛰어난 자가 일개 아녀자의 손에 죽어 눕다니"라는 비탄의 말을 남기는 것으로 끝난다. 역사적으로 의심할 바 없이 전쟁터가 아닌 결혼식 후 새아내의 침실 안에서 죽은 아틸라를 겨냥한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이야기를 니벨룽겐의 슬픔이라 하였는데 이 슬픔은 비슷한 시대 여러 인물들에서 취재한 것이라 당시에는 야만세계건 로마세계건 가리지 않는 어떤 역사적 보편성을 갖는 슬픔이자 괴로움이었다. 잘못되고 혼란한 정치는 훈제국과 로마제국 양쪽에서 숱한 포로들과 망명자들을 양산해 냈고 양제국간 강화협상에 그들의 송환이 단골 소재로 협상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비록 재주가 있고 뜻이 있고 용맹성 마저 갖춘 사람이라 하더라도 로마에서든 훈족에서든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그를 위해 동료의 조력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기번은 프리스쿠스(Priscus)의 기록에 보이는 당시 훈족 궁정에 망명자로 있던 로마인의 한탄과 저주를 소개하며 이 시대 로마의 타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흉노족의 한 포로)는 전 주인의 식탁에 앉게 되었고 이 배교 그리스인은 그의 포로생활기의 축복을 신에게 기원했는데, 그것이야 말로 군사복무라는 영예로운 직을 수행하는 행복하고 독립된 상태를 가져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는 자연스레 로마 정부의 잇점과 결점에 대한 논란을 주는데, 그 배교자에게 말해졌으며 프리스쿠스의 장황하나 근거없는 연설로 변명된 것이다. 이 피해방인은 진실되고 생생한 색채로 그리 오랫동안 그를 희생양 삼았던 쇠락하는 제국의 악들을 그려냈다. 공적 적들에 맞서 그 신민을 보호할 능력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무장하려하는 것은 내켜하지 않는 로마 군주들의 잔인한 위선, 임의무단적 징수방식으로 억압이 배가되는 무자비한 중세, 수많으면서도 상호모순된 모호한 법률들, 부자의 영향력은 증가시키며 빈자의 상태는 악화시키는 보편적인 부패들이다. 애국적 감성이 드디어 이 운좋은 망명객의 가슴 속에 뜨겁게 되살아났다. 그는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건실한 조직을 왜곡시킨 정무관들의 악함과 약함에 하염없는 눈물로 탄식했다.

그는 도시 함락과 함께 노예가 되었던 로마상인으로 전쟁에서 로마와 싸워 얻은 전리품을 속전으로 바치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한편, 훈족은 바다 건너의 동맹을 두기도 했다. 그것이 아프리카에서 할거한 가이세릭의 반달족이었다. 가이세릭은 히포를 함락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가 있는 도서관을 보존한 채 카르타고를 함락하는 439년까지 이곳을 자기 왕국의 첫 수도로 사용하였다. 그는 동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장자 훈네릭(Huneric)을 볼모로 제공하고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지만, 439년 돌연 이를 깨고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쓰러져 가는 제국과 지중해 해상권을 다투기 시작했다. 기세를 몰아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등을 장악했다. 437년 성년에 이른 서로마 황제가 표면적으로 친정을 하고 이전의 약속대로 동로마 황제의 딸인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 결혼을 한 데 힘입어 공고해진 동서로마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442년 반달원정을 수행하려던 동로마군의 계획은 훈과 반달족의 동맹으로 좌절되었다. 반달족의 요청을 받은 훈족의 침입으로 시칠리아에서 다뉴브전선으로 소환되었던 것이다. 훈족은 이렇게 동서 양제국에 대한 효과적으로 압박해 너 많은 세공과 세금을 빨아들였다.

*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John Julius Norwicheducation>
** 이것은 17세기 발견된 한자와 시리아언어로 기록된 당나라 시대의 "대진경교유행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말한다. <3천년 기독교 역사, 1권,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저, 박창훈 역>
*** 아티쿠스는 심지어 이교도에게도 관용적이어서 강압적 수단을 자제했다고 한다.
**** 루아(Rua), 옥타르(Octar), 문주크(Mundzuk) 삼형제 역시 공동왕이었을 것이라 한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문주크의 아들이다.
***** <Socrates Scholasticus, Church History, vii. 30>
******( 결혼을 위해 발렌티니아누스가 몸소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이 때 스틸리코 이래 문제가 되던 달마티아 등이 동로마에 양도되었을 것이다.

덧글

  • 꼬장꼬장한 얼음정령 2014/11/15 14:25 #

    안녕하세요
    로마제국의 역사자료가 필요하여 본 사이트에 들어와서 좋은 자료가 있어 많이 활용하려고 합니다.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인사차 들어왔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자료를 세미나 인도할 때 사용해도 되는지요?
    기번의 해석은 계속해서 하실 것인지 참으로 궁굼합니다.
    특별히 부탁을 드린다면 사건의 발생 년도의 표기를 많이 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자료에 감사를 드립니다.
  • DreamersFleet 2014/11/16 23:36 #

    온라인상으로 자료들이 함부로 돌아다니게 되지 않는다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발생 년도는 능력닿는 내에서는 명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후 문맥상 추측하 수 있도록 노력했지요. 차후 수정할 때 참고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기번 2014/12/27 00:48 # 삭제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와 훈족의 아틸라가 벌이는 대결이 안 나와서 아쉽습니다. ㅎㅎ
    그래도 정말 쉽게 잘 쓰셔서 눈에 잘 들어옵니다.
  • DreamersFleet 2014/12/31 22:47 #

    중간에 몇 번이 빠졌죠.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네요.

    좌우간, "기번"님을 비롯해 열심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기번 2015/01/01 15:33 # 삭제

    네...저야 말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리플이 좀더 많이 달렸으면 하네요. ㅎㅎ
  • DreamersFleet 2015/02/19 18:52 #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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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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