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 몸젠로마사3권 30

 제 9장 아시아의 안티오쿠스와의 전쟁 (The War with Antiochus of Asia)

안티오코스 대왕  

아시아 왕국에서 셀레오코스 조의 왕관은 531년 이래 그 왕조의 시조의 4대손인 안티오코스 3세에 의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필리푸스(Philip)와 마찬가지로 열아홉 나이에 통치를 시작해서 충분한 정력과 수완을 시전하였는데 특히 동방원정에서였으며 그리하여 그의 존재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터문없지 않게  "대왕"이라고 격식차려 언급되었다. 그는 그의 맞수들 특히 그 이집트인 필로파토르(Philopator)의 태만이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어느 정도 군주제 통합을 회복하고 그의 왕관아래 메디아(Media)와 Parthyene의 사트라프 구역의 동부와 나중에 아카에우스(Achaeus)가 소아시아(Asia Minor)의 타우루스(the Taurus)의 이편에 세운 별개의 국가를 재통일는데 성공하였다. 이집트인들로부터 시리아 해안을 탈취해낼 첫 시도에 대해 그 손실을 트라시메네 호수(Trasimene lake)의 전투가 있던 해에 그가 뼈져리게 느꼈고 그것이 필로파토르(Philopator)의 라피아(Raphia)에서의 유혈적 격퇴를 만났으며, 안티오코스(Antiochus)는 이집트와 경쟁을 재개하지 않도록 한 사람-비록 그가 한 나태한 자일지라도-이 이집트 왕좌를 차지한 한에는 주의했다. 하지만, 필로파토르( Philopator)의 죽음(549) 이후 이집트(Egypt)를 침몰시킬 최적의 순간이 도달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생각에 안티오코스(Antiochus)는 필리푸스(Philip)와 협조 관계에 들어섰던 것이며 필리푸스가 소아시아(Asia Minor)의 도시들을 공격하는 동안 스스로 코엘레(Coele)-시리아(Syria)로 뛰어들었다. 로마인들이 그 마당에 뛰어들었을 때, 순간 마치 안티오코스(Antiochus)가 필리푸스(Philip)와 함께 그들에 대항하는 공동의 목적을 가질 것 같았다-동맹 조약에 의해서 뿐 아니라 사태의 위상에 의해서 제안된 과정. 하지만, 로마인의 동방 사태에 대한 어떤 개입에도 전력을 다해 즉시 물리칠만큼 멀리 보지 못하는 안티오코스는 생각하기를 그의 최상의 길은 필리푸스(Philip)의 로마인에 의한 굴복(쉽게 예견되는 일일지 모른다)의 수해를 받는 것이며 이는 전에 그가 필리푸스와 기꺼이 나누었던 이집트 왕국을 홀로 자신의 보호하에 두려는 것이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궁정과 그 왕가의 피보호자와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절대 이름으로 있는 그의 "보호자"가 됨을 실제로 의도하지 않은 원로원은 극도로 필요한 경우외엔 아시아 사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로마 세력을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과 헬레스폰트(the Hellespont)로 제한한다고 단호히 결정했고 그것이 대왕이 그의 길을 가게 허용했다. 그 자신이 이집트 땅의 정복-성취되기는 것보다 더 쉽게 이야기 됨-에 진지하다는 것은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집트의 외국소유지들의 굴복을 차례차례 생각하여 시리아(Syria)와 팔레스타인(Palestine)은 물론 실리시아(Cilicia)에서 즉시 그들을 공격했다. 그가 556년 이집트 장군인 스코파스(Scopas)에 대해 요단(the Jordan)의 발원지 부근의 파니움(Panium) 산에서 거둔 대승은 그에게 이집트 땅 국경에 이르는 그 지역에 대한 완벽한 소유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어린 왕의 이집트인 보호자들을 놀라게 하여 안티오코스가 이집트를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평화로소 굴복하고  안티오코스의 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그들 피보호자의 청혼서를 봉인하였다.  그가 이렇게 첫 목표를 성취하였을 때 다음 해에 키노스세팔라이 전투(battle of Cynoscephalae)의 그것을 100의 갑판선과 100의 비갑판선의 강한 함대와 함께 소아시아(Asia Minor)로 진행시켜 소아시아의 서부와 남부 해안상의 이집트의 전 소유 지구에 대한 소유-아마도 이집트 정부는 디팩토(de facto)상 필리푸스의 손에 있는 이들 지구를 안티오쿠스에게 평화조약하에 양도하고 그의 호의로 모든 그들의 외국 소유지를 부인함 -를 얻었으며소아시아(Asia Minor)의 그리스인들을 일반적으로 그의 제국을 위해 회복하였다. 같은 순간 강한 시리아 육군이 사르디스(Sardes)에 모였다.

로마와의 곤란 

이 사업은 처음부터 필리푸스(Philip)에 대한 조건으로 그가 소아시아()로 부터 수비대를 철수시키로 로모스인(Rhodian)들과 페르가무스인(Pergamene)들에게 그들 지경을 자유 도시들에게는 전의 국제(國制)를 손상치 않게 내버려 둔게 하는 것을 결정하고 지금 안티오코스(Antiochus)가 필리푸스 대신 그들을 자지하는 동안 구경해야 했던 로마인(Roman)들과 간적접인 관련이 있었다.  아탈루스(Attalus)와 로도스인(Rhodian)은 몇년전 그들을 필리푸스(Philip)와의 전쟁으로 몰고갔던 것과 정교하게 같은 위험으로 안티오코스(Antiochus)에게 스스로가 지금 직접적으로 위협당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자연스럽게 막 끝난 전쟁은 물론 이번 경우에도 로마인들을 연루시키는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미 555~6년에 아탈루스는 로마로부터의 안티오코스에 대항한 군사원조를 요구하였는데, 그는 아탈루스(Attalus)의 군단이 로마 전쟁에 고용되는 동안 그의 지경을 점령했다. 더 정력절인 로도스인들은 안티오코스 왕에게 그의 함대가 557년 소아시아 해변에 출현하자 첼리도니아 섬(리디아 해안 위)을 너머 지나는 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안티오코스(Antiochus)가 그 위협에 주의하지 않자 키노스세팔라이 전투에서 도착한 설명에 대담해져서 즉각 전쟁을 시작하여 실제적으로 그 왕에게서 카리아(Caria) 도시들 중 가장 중요한 카우누스(Caunus),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 민두스(Myndus)와 사모스 섬(island of Samos)을 보호하였다. 대부분의 반자유 도시들이 안티오코스(Antiochus)에 굴복하였지만 그들중 몇몇 더욱 특히나 스미르나(Smyrna)의 중요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Alexandria Troas)와 람프사코스(Lampsacus)는 필리푸스(Philip)의 완패를 알고 마찬가지로 시리아인들에게 저항할 용기를 갖게 되고 절실한 간청이 로도스인들의 그것과 결합되었다.

이는 틀림없이 안티오코스(Antiochus)가 전적으로 결정을 내려 그에 연연할 수 있는 한은 이미 그의 제국에 아시아(Asia)의 이집트 소유지들을 속하게 할 뿐 아니라 유럽(Europe)에서 그 자신 책임으로 정복을 수행할 것과 그런 이유에서 로마와 전쟁을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아무튼 그 위험을 무릅쓰게 이미 마음을 정하였다고 생각하게 한다. 로마는 이렇게 그들 동맹의 그런 요구에 응하여 아시아에 직접적아으로 간섭할 모든 이유가 있었으나, 그렇게 하려 기울어진 성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전쟁이 지속되어 아탈루스(Attalus)에게 첫 순간 효과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추가할 수 있는 외교적 중재라는 보호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리 후에도 프톨레미(Ptolemy)와 필리푸스(Philip)의 손에 있던 도시들이 안티오코스에 의해 탈취되지 말아야 하는 듯 그들이 의심할 바 없이 말하는 반면에 그리고 미리나(Myrina), 아비두스(Abydus), 람프사코스(Lampsacus)[1], 키우스(Cius) 등 아시아 도시들의 자유가 로마 문서들에서 셈되는 반면에 그들이 그에 효력을 주는 가장 작은 단계도 취하지 않았고 안티오코스 왕이 마케도니아 수비대의 철수에 의해 받은 호의적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것을 소개하도록 허용하기 까지 하였다. 사실상, 그들은 유럽(Europe)에서 558년 봄 그의 상륙과 트라키아의 케르소네스(Thracian Chersonese)를 침략하는 것에 굴복하는데 까지 나아갔는데 그는 세스투스(Sestus)와 마디투스(Madytus)를 차지하고 상당 시간을 트라키아의 야만인들의 응징과 파괴된 리시마키아(Lysimachia)의 재건에 소비하였는데 후자를 그의 군사력의 주요 지역과 트라키아(Thrace)의 새로 조직된 사트라프(satrap) 지의 수도로서 선택하였다. 이런 사태 처리가 위임된 플라미니우스(Flamininus)는 사실 리시마키아(Lysimachia)의 그 왕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그가 이집트 지경의 통합과 헬렌인(Hellene)들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에 관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왕은 자기 조상 셀레오코스(Seleucus)에게 정복되었던 고대 리시마쿠스 왕국의 의심스런 합법적 칭호에 대한 말로 대구하면서 자신이 지경의 획득이 아니라 그의 세습영지의 통합을 유지하는 일을 수행한다고 설명하고서는 소아시아에서 그에게 굴복한 도시에 대한 분쟁에서 로마의 개입을 거부해버렸다. 정의에 입각 그는 평화는 이미 이집트()와 맺었고 로마인들은 개입에 있어 어떤 공식적 구실도 이렇게 멀쩡히 박탈되었다는 것을 덧붙였다[2]. 이집트(Egypt)의 어린 왕의 죽음이라는 잘못된 보고가 연출한 왕의 재빠른 아시아로의 귀환과 그것이 암시한 키프로스(Cyprus)에서나 심지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의 상륙할 계획들은 어떤 결론도 없이 그 회담의 결렬시킴에 이르게 하였으며 더 심하게도 아무 결과도 없었다. 다음해 559년, 안티오코스는 리시마키아로 그의 강화된 수륙군과 돌아왔고 그의 아들 셀레오코스를 위해 예전한 새로운 사트라프 지구 조직에 몰두하였다. 카르타고(Carthage)로 부터 달아나야 했던 한니발(Hannibal)은 에페소스(Ephesus)의 그에게 와서 그 추방에 따른 별나게 영예로운 대접이은 실제적으로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럼에도불구, 플라미니우스(Flamininus)는 560년 봄 모든 로마수비대를 그리스(Greece)에서 철수시켰다. 이것은 현존 항태에서는 적어도 실수에 의한 오류였는데 비록 그 자신의 더 나은 지식에 반대되는 범죄적 행위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러했다. 왜냐면 플라미니우스(Flamininus)가 완전히 전쟁을 끝내 헬라스(Hellas)를 해방하는 줄지 않을 영광을 고구에 가져가지 위하여 잠시 반란과 전쟁의 타다남은 불씨를 표면적으로만 덮는데 만족하였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는 때문이다. 그 로마 정치가가 그가 그리스(Greece)를 직접적으로 로마의 지배아래 두려하는 어떤 시도와 아시아 사태에서 로마의 어떤 개입을 정치적일 실수로 되는 선언하는 것은 옳게은 것이지만, 그리스에서 들끓는 반대와 그 아시아 왕의 허약한 거만함과 이미 로마에 대항헤 서방에서 일어난 로마의 쓰디쓴 적의 시리아의 본부에 거주-이 모든 것이 헬렌적 동방측에서 신선하게 무기를 드는 일이 접근함에 대한 분명한 표시-이는 적어도 그 목적을 위해 그리스(Greece)를 로마의 피보호자에서 로마의 반대되는 국가의 피보호자로 전이시켜야하는 것 이외엔 도리가 없고 그 목표가 도달되어야 하어야 한다면 즉각적으로 그 작전반경을 확장시킬 것이었다. 로마가 이것이 일어나게 허락할 수 없는 것은 간단히 알 수 있다. 플라미니우스(Flamininus)가 이런 확실한 전쟁 지표들 모두를 무시하면서 그리스(Greece)에서 수비대를 철수하고 동시에 그의 군대를 이용해 지원할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닌 아시아(Asia)의 왕에 대한 요구를 할 때에 그는 말에서 그의 역할을 넘어섰고 마찬가지로 행동도 부족하여 그의 개인적 허영-이 허영은 로마에 평화를 양쪽 대륙의 그리스인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싶거나 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에 대한 관용에서 한 장군으로서와 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했다.

로마와의 전쟁에 대한 안티오코스의 준비  

안티오코스(Antiochus)는 그의 편에서 결정될 전쟁이 나기 전 고국에서 그의 위치와 이웃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데 예기치 않은 유예를 두었고 점점더 그렇게 됨에 따라 적은 더 꾸물거리게 되었다. 그는 이제(561) 그의 딸 전에 약혼된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주어 이집트(Egypt)의 어린 왕과 결혼시켰다. 동시에 그가 그의 사위에게서 따낸 속주들을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하였다는 것은 후에 이집트 측에서 확인되지만 아마 보증은 없었다. 아무튼 그 대지는 실질상 시리아 왕국에 붙어있었다[3]. 그는 557년 아버지 아탈루스(Attalus)를 이어 페르가무스(Pergamus)의 왕좌에 오른 에우메네스(Eumenes)에게 그에게서 취한 소도시들을 회복시키고 그에게는 로마와의 동맹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또한 그의 딸 중 하나를 배우자로 주었다. 이런 방식에서 그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왕 아리아라테스(Ariarathes)에게 딸을 내려주었고 갈라티아인(Galatian)들을 선물로 얻었고 반면 끊임없이 반란중인 피시디아인(Pisidian)들과 다른 작은 부족들은 압박했다. 광범위한 특권이 비잔티움인(Byzantine)들에게 인정되었다. 소아시아 도시들과 관련해 왕은 로도스(Rhodes)와 키지쿠스(Cyzicus) 같은 오랜 자유 도시들의 독립을 허용할 것이며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의 주건의 단순한 형식 승인에 만족하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가 로도스인(Rhodian)들의 중재에 고개숙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주기도 했다. 유럽측 그리스에서 그는 안전하게 아에톨리아인(Aetolian)에게  의지하였고 필리푸스(Philip)가 다시 무기를 들게 유도하기를 희망하였다. 사실상, 한니발(Hannibal)의 계획 하나가 왕실의 승인을 얻었는데 그에 따르면 안티오코스(Antiochus)로 부터 100 척의 함대와 10,000의 보명과 1,000의 기병으로 된 지상 군을 받도록 되었고 카르타고(Carthage)에서 세번째 퓨닉전쟁(Punic war)을 그리고서는 이탈리아()에서 두번째 한니발 전쟁(Hannibalic war)을 처음 불붙이는데 그들을 이용하도록 되었다. 티레의 사절들이 카르타고()로 나아가 그곳에서 무력을 일으킬 기반을 닦았다[4]. 드디어, 스페인의 봉기에서 좋은 결과가 예견되었는데 그것은 한니발이 카르타고를 떠날 때 그 절정에 있었다[5].

아에톨리아인의 로마를 향한 음모 

폭풍이 이렇게 멀나멀리서 로마를 향해 몰려드는 동안 최소의 중요성을 가지면서 가장 중요하고도 극도의 인내에 의한 행동을 수행하는 자들은  그 사업에 연루되어버린 헬렌인()들이었다. 몸시 성이 난 거만한 아에톨리아인은 필리푸스()가 그들에게 무찔름을 당한 것이지 로마인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면서 안티오코스가 그리스로 전진하기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조금씩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책은 스트라테구스(strategus)가 조금 후에 플라미니우스(Flamininus)에게 준 답장에 특징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때에 그는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에 대한 사본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아에톨리아의 군대가 티베르에서 진을 친다면 몸서 그가 이를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아에톨리아인들은 그리스의 시리아 왕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며 왕에게는 전 헬렌인(Hellene)들이 팔을 벌려 그를 진정한 구원자로 맞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고 그리스에 있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사람들에게는 그 왕의 상륙이 실상보다 더 가까웠다고 하는 이중 기만행위를 했다.   이렇게 그들은 실제로 나비스(Nabis)의 단순한 옹고집을 통해 562년 봄에 플라미니우스(Flamininus)가 떠난 후 2년만에 그리스(Greece)의 단합을 이완시키고 전쟁의 불곷을 다시 붙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데서 그들의 목적이 빠졌던 것이다. 나비스(Nabis)는 자유 라코니아의 소도시들 중 하나인 기티움(Gythium)을 공격했는데 그 곳은 마지막 조약으로 아카이아 연맹에 합병되었던 곳이었고 이를 취하였다. 하지만 그 경험많은 아카이아의 스트라테구스(strategus) 필로포이멘(Philopoemen)은 그를 Barbosthenian mountains에서 패배시켜서 그 폭군은 그의 군대의 4분지 일을 그의 수도로 돌려보냈고 그 곳에서 필로포이멘이 그를 꼼짝못하게 했다.  이런 개전이 안티오코스(Antiochus)가 유럽(Europe)으로 가게할 충분한 유인이 되지 못함에 따라 아에톨리아인은 스스로가 스파르타(Sparta), 칼키스(Chalcis), 데메트리아스(Demetrias)를 소유하고 이런 중요한 소도시의 수득으로 그 왕이 승선하는 것을 재촉하고자 했다. 첫째로 그들은 스파르타(Sparta)의 정복자가 되려고 생각하여 아에톨리아인 알렉사메누스(Alexamenus)가 1,000명으로 동맹조약에 따라 분견대를 보내는 핑계하에 진군하게 하며 나비스(Nabis)를 쫓아버리고 그 소도시를 점령할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이가 행하여졌고 나비스는 그 군단들의 사열 도중 죽음을 항했다. 하지만 아에톨리아인들이 그 소도시 약탈을 위해 분산되었을 때 라케다에모니아인들은 결집할 시간이 있어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들을 결집해 베어버렸다. 그 도시는 그때서야 필로포이멘(Philopoemen)에 의해 아카이아 동맹에 가담했다. 아에톨리아인들의 이 훌륭한 사업이 그렇게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파의 손에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전역을 거쳐 통일하는 바로 반대의 효과를 남긴 이후에 칼키스(Chalcis)에서 그들에게 이가 더 잘한 이 거의 미미했는데, 로마파가 거기 에우보이아(Euboea)의 로마에 호의적인 에레트리아(Eretria)와 카리스투스(Carystus)의 시민들을 소환하여 아에톨리아인과 칼키스 추방자들에 대항한 시의적절한 원조를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반명 데메트리아스(Demetrias)의 점령은 성공적이었는데, 그 도시가 할당된 마그네시아인(Magnete)이 합리성이 없지 않게 로마인에 의해 필리푸스(Philip)에게 그것이 안티오코스(Antiochus)에 대항한 그의 원조의 댓가로 주어지는 상으로 약속되었음을 념두에 두었다. 아에톨리아 기병의 여러 분대가 게다가 소환된 로마 반대파의 두목 에우리로코스(Eurylochus)에 대한 호위대를 만든다는 구실하에 그 소도시를 그럭저럭 덮쳤다. 이래서 마그네시아인(Magnete)들은 부분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합의로 부분적으로는 강요로 아에톨리아의 측변으로 지나쳤고 후자는 셀레오코스 궁정에서 이 사실을 틀림없이 이용했다.

안티오코스(Antiochus)와 로마인(Roman)의 균열 

안티오코스가 그의 결정을 내렸다. 로마와의 균열이 이를 사절을 통한 외교적 임시처방에 의해 연기하려는 노력들에도 불구 더 이상 피할 수가없었다.  이른 561년 봄, 플라미니우스(Flamininus)는 동방사태에 대해 원로원에서 결정권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지속하였는데 그 왕의 사절들인 메니푸스(Menippus)와 헤게시아낙스(Hegesianax)에게 로마의 최후통첩 즉 그가 유럽(Europe)에서 철수하고 아시아(Asia)를 그의 처분에 맡기던지 트라키아(Thrace)를 보유하여 스미라(Smyrna), 람프사코스(Lampsacus),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Alexandria Troas)에 대해 로마의 보호구너을 설정하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이런 요구들은 다시 소아시아(Asia Minor)에서 왕의 주요 탄약고이자 상주지인 에페소스(Ephesus)에서 562년의 봄에 안티오코스()와 원로원의 사절들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Publius Sulpicius)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Publius Villius)간에 토의되었고, 그들은 양측에서의 신념 즉 평화정착이 더이상 가능치 않음에 의거 분열되었다. 562년 바로 그 여름에 3000병의 병사들을 승선시킨 30척의 로마 함대가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Aulus Atilius Serranus)의 휘하에서 키티움(Gythium)에 나타났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도착이 아카이아인들과 스파르타인 사이의 조약 체결을 가속시켰다. 시칠리아(Sicily)와 이탈리아(Italy)의 동쪽 해안은 수비대가 강하게 지켜서 어떤 상륙 시도에도 안전했으며  상륙 군대는 그리스(Greece)에서 가을 쯤에 기대되었던 것이다. 562년 봄이래 플라미니우스(Flamininus)는 원로원 지시로 그리스(Greece) 구석구석을 여행하여 반대파의 음모를 좌절시키고 그 나라의 시기상 부적절한 철수의 사악한 영향에 가능한 한 멀리까지 대응하였다. 아에톨리아인들은 이미 로마에 대항해 그들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플라미니우스(Flamininus)는 로마인들을 위해 칼키스(Chalcis)를 거기로 500명의 아카이아인(Achaean)과 500명의 페르가무스인(Pergamene)의 수비대를 밀어넣는 것으로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데메트리아스(Demetrias) 또한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마그네시아인(Magnete)들은 동요했던 것이다. 비록 안티오코스(Antiochus)가 대전쟁 시작 전 굴복시키려고 제안한 소아시아의 몇몇 소도시들은 여전히 버텼지만 그는 이제 그가 로마인에게 기꺼이 2년전 그리스에서 수비대를 물려서 포기했던 모든 이익들을 회복시키지 않는 한 더이상 그의 상륙을 지연시킬 수 없었다. 그는 수중의 함선들과 군단들-그는 40의 갑판선과 10,000의 보병과 500의 기병과 6 코끼리를 가졌다-을 소집하였고 트라키아 케르소네스(Thracian Chersonese)로 부터 시작하여 562년 가을에 Pagasaean gulf 상의 프테레움(Pteleum)에 상륙하였고 즉시 인접 데메트리아스(Demetrias)를 점령했다. 거의 같은 때에 로마군 약 25,000이 법무관(praetor) 마르쿠스 바에비우스(Marcus Baebius) 휘하에서 아폴로니아(Apollonia)에 상륙했다. 전쟁이 이렇게 양측에서 시작되었다.

소규모 세력에 대한 태도    

모든 것이 로마에 대한 안티오코스가 우두머리로 추진한 종합적으로 계획된 맹약이 실현되는 정도에 달렸다. 적들을 무엇보다 카르타고(Carthage)와 이탈리아(Italy)의 로마인들에게 불러들일 그 계획에 관해 그의 전 경력을 통해그렇듯  시덥잖고 비천한 민중들을 위한 그의 고귀하고 높은 정신상에서 나오는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 에페소스(Ephesus)에서의 한니발(Hannibal )의 운명이었다. 그 실행에 대해 몇 카르타고 애국당원들이 합의되었다는 것외엔 행해진 것이 없었다. 어떤 선택도 로마(Rome)에 대한 무조건 굴복을 보이는 것 말고는 카르타고인들에게 남지 않았던 것이다. 카르타고와 한니발    그 도당산은 한니발(Hannibal)-이런 사람은 궁정 도당에 대해서는 너무나 걸맞지 않은 위대함을 가진 것이다-과 관련되지 않으려 할 것이었고, 그 이름이 로마 아이들을 공포스럽게 한 장군을 로마사절과의 협력해 고소하는 것 같은 갖가지 이상한 처방을 시험한 후에  그들은 모든 하찮은 군주들처럼 그의 독립성에 크게 의지해 화려하게 차려입고 아무것도 영향을 받지 않아 너무나 쉽게 다스려지게 된다는 두려움에 의해 그리되었던 안티오코스 대왕(Antiochus the Great)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그가 스스로를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 옆에 그늘로 떨어뜨리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에 이르게 했다. 따라서 엄숙한 회의에서 페니키아인(the Phoenician)들이 미래에 오즉 하위적 사업과 조언-물론 그 조언이란결코 따르지 말 것이라는 꺼리낌과 함께-을 주는 것만을 위하여 이용되어야만한다고 결정되었는다. 한니발(Hannibal)은 모든 위임을 받아들여 찬란히 모두를 실행에 옮김으로서 그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복수하였다.

소아시아(Asia Minor)의 국가들 

아시아에서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그 대왕에게 붙어버렸다. 비티니아(Bithynia)의 프루시아스(Prusias)는 반면 언제나 그렇듯 강자 편을 취했다. 에우메네스(Eumenes) 왕은 그의 집안의 오랜 정책에 충실하게 남았는데 이는 지금 드디어 그에게 진실된 열매를 요구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안티오코스(Antiochus)의 제의를 거절해왔을 뿐아니라 끊임없이 로마인에게 전쟁을 권했고 그로부터 그는 그의 왕국의 광대화를 기대했다. 로도스인(Rhodian)과 비잔티움인(Byzantine)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옛 동맹에 가담했다. 이집트는 역시 로마(Rome)의 편을 취해 보급이나 인적인 지원을 보냈는데 이를 로마인들은 받지 않았던 것이다.

마케도니아(Macedonia)   

유럽(Europe)에서 그 결과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필리푸스(Philip)가 취했을 위치에 주로 좌우되었다. 안티오코스(Antiochus)와 연합하는 것은 아마도 과거의 모든 상처와 단점들에도 불구 그에게는 올바른 정책이었으리라. 하지만 필리푸스(Philip)는 이런 고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호불호에 의해 통상 영향받았고 그의 미움은 자역스럽게 그 신의없는 동맹에 대항하는 쪽으로 향했는데 그들은 그가 홀로 공공의 적과 다투도록 내버려 두어왔고 전리품에서 자기 몫만을 잡으로고 애써왔으며 트라키아()에서는 그에게 골칫거리 이웃이 되어왔는데 이것이 그를 존경스럽고 영예롭게 대우하는 그 정복자에 대항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안티오코스(Antiochus)는 게다가 마케도니아 왕관에 대한 부적절한 참칭자들을 마련함과 키노스세팔라이(Cynoscephalae)에서 표백된 마케도니아인의 뼈를 과시하기 위해 매장함으로써 필리푸스(Philip)의 급한 성미에 깊은 원한을 샀다. 필리푸스(Philip)는 그런까닭에 마음에서 나오는 열정으로 그의 전력을 로마 처분에 맡겼다.

하(下) 그리스 국가들  

그리스(Greece)의 두번째 세력인 아카이아 연맹(Achaean league)은 첫째에 못지 않게 로마와의 동맹에 결정적으로 집착했다. 로마에 의해 유지된 테살리아인(Thessalian)과 아테네인(Athenian)의 더 작은 세력중에 후자 속에서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성채로 유입된 아카이아 수비대 하나가 아주 강한 애국당을 알아듣게 했다. 아에톨리아인(Aetolian)과 에피로스인(Epirot)들은 양 쪽파와 가능하면 좋은 조건을 유지하려는 분투를 했다. 이렇게 이웃의 페라에비아인(Perrhaebian)의 일부가 가담한 마그네시아인(Magnetes)외에 안티오코스(Antiochus)는 아타마네스(Athamanes)의 약한 왕인 스스로 마케도니아 왕관에 대한 바보같은 도모로 눈이 멀게 허용한 아미난더(Amynander)에게만 지원받았다. 그 중 로마 반대 당이 아직 키를 쥔 보이오티이인(Boeotian)에 의해 그리고 펠레폰네소스(Peloponnesus)에서는 아에톨리아인(Aetolian)들과 아카이아인(Achaean)에 대항하여 한 몫 거들던 엘레아인(Elean)과 메세네인(Messenian)에 의해 그러했던 것이다. 이는 진실로 희망적인 시작이었으며 아에톨리아인들이 그 대왕에게 제청한 최고사령관이란 절대 권력의 칭호가 설상가상의 해로 보였다. 바로 흔히 그랬듯 양측에서 기만은 있었다. 아시아(Asia)의 셀수 없을 만큼의 부족무리들 대신에 왕은 정규 집정관 군대의 겨우 절반의 힘을 데려왔고, 전 헬렌인(Hellene)들이 로마의 굴레로 부터 구원자를 맞을 쌍수대신에 크레프트(klepht)의 한두 부내와 몇 방탕한 시민 공동체가 왕에게 무력면의 형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리스(Greece)의 안티오코스(Antiochus)      

잠시 진정으로 안티오코스(Antiochus)가 그리스 땅에서 로마인들을 예견했었다. 칼키스(Chalcis)가 로마인의 그리스 동맹 수비대에 의해 지켜졌으며 첫 소환들을 거부하였으나 그 요새는 안티오코스가 그의 전력으로 진군했을 때 굴복하였으며 로마 분파는 그것을 점력하는데 너무 늦어 델리움(Deliurn)에서 안티오코스에게 전멸당했다. 에우보이아(Euboea)는 이렇게 로마인들에게 상실되었다. 안티오코스(Antiochus)는 아직 겨울조차 아에톨리아인(Aetolian)과 아타마네스(Athamanes)와 협조하여 테살리아(Thessaly)를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테르모필레()가 점령되었으며 페라이()와 다른 소도시들이 탈취되었던 것이지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가 2,000 명으로 아폴리니아(Apollonia)로부터 와서 라리사(Larisa)를 구하고 거기서 그의 위치를 잡았다. 안티오코스(Antiochus)는 겨울 원정에 싫증이 나 칼키스(Chalcis)에서 쾌적한 진영으로 돌아갈것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시간이 재밌게 쓰여졌고 왕은 50나이에와 그의 호전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칼키스 미녀와 혼인을 맺기 까지 하였다. 그래서 562-3년의 겨울이 안티오코스()가 여기저기 그리스(Greece) 구석구석 편지를 보낼 이상의 일을 하는 것 없는 채 지났다. 그는 전쟁을 펜과 잉크를 수단으로 벌였다-한 로마 관리가 주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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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Lautitia 2012/02/14 16:39 # 삭제 답글

    호오 ㄷㄷㄷㄷㄷ 직접 번역하셨나요?? -0-
  • DreamersFleet 2012/02/14 22:28 #

    그렇습니다. William Purdie Dickson 의 몸젠 <로마사> 영역판을 옮긴 겁니다. 누구나 이정도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나름 자부하지만, 틈틈히 마음내키는대로 하는 일이라서 책임은 못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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