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도 로마도, 역사가 보여준 기축통화 붕괴의 패턴


서로마 이후 이민족 왕국(2) -<로마제국쇠망사>78 로마제국쇠망사


오도아케르, 이탈리아 왕(476-493년)

로마를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된 오도아케르 등 게르만 족이 믿은  아리우스파는 제국에서 이단시되는 종파였지만, 오도아케르는 로마의 전통을 절멸시키려하지도 로마인의 종교인 카톨릭을 박해하지 않았다. 서로마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루스를 년 6000 솔리두스(로마 금화)의 연금과 루쿨루스의 화려한 별장을 주기로 하고 은퇴시켰다. 자신은 복위된 동로마 제노 앞에 파트리키우스(patrician)를 자처했다.  서로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제노는 자신이 임명한 네포스를 달마티아로 추방한 것을 책망하였으나 네포스가 암살되고 오도아케르가 달마티아를 차지하자 현실을 받아들였다. 또 제노는 복위 후 양다리를 걸쳤던 아르마투스(Armatus)를 숙청할 때 동로마에서 복무하던 오도아케르의 형제를 이용한 바 있었다. 후에 테오도릭을 보내 오도아케르 정권을 전복시키게 한 것을 보면, 이런 묵인은 당시 상황상 제노의 진심을 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스트로고트족의 테오도릭

테오도릭은 비시고트 왕가인 발티(Balti)와 다른 아말(Amal) 왕가 출신으로 판노니아에서 테오도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생전 신임했던 발라미르(Valamir)의 두 형제가 테오도미르(Theodemir)와 비데미르(Widemir)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사돈 형제라고 한다. 이들 삼형제가 마르키아누스 황제에 의해 정착된 고트족의 판노니아를 삼분한 각자 영역을 담당하며 협심하여 고트족을 이끌었다. 아틸라 사후에 발라미르는 아틸라의 아들들의 훈족으로 부터 독립을 성취한 후 다시 그들의 간섭을 격퇴하였다. 이들이 동로마 레오(Leo) 황제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 동맹의 댓가로 테오도릭은 여덟살 부터 동로마 궁정의 인질을 살았고 부족은 년간 300파운드의 금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가 로마식 교육이나 문화에 익숙한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라미르가 스키리족(Sciri)에 맞선 전투에서 쓰러지고 비데미르가 이탈리아의 그리세리우스 황제의 청으로 갈리아로 부족군대를 이끌고 떠나자 판노니아 고트족의 왕위는 테오도미르에게 전해졌고 다시 18살의 테오도릭이 계승하였는데 서로마 멸망 즈음의 일이다. 

고트족의 테오도릭과 동로마

테오도릭의 출발과 이탈리아 진군 과정은 백년 전 비시고트족의 알라릭과 비슷한 점이 많다. 부족의 왕이 되기 전에도 테오도릭는 다뉴브 인근의 사르마트족을 물리쳐 신망을 쌓은 바 있었다. 왕이 된 이후로 동로마 황제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에게 협력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와 트라키아 등 제국 내부를 혹독하게 노략질 한 전력이 있는데 알라릭과 공통적이다. 같은 게르만족인 아스파르를 숙청하고 이사우리아인들을 중용한 레오의 뒤를 이사우리아인 사위인 제노(원래 Trascalisseus 라는 이름)가 잇게 되었을 때 테오도릭은 그의 편에 섰다. 제노는 같이 즉위한 아들(레오의 손자 레오2세)의 이른 죽음으로 정통성 등을 의심받았고, 레오의 미망인인 베리나(Verina) 남매가 다시 동로마 특유의 여인천하를 연출하였다. 제노는 이들에게 일시 황위를 빼앗기고 근거지인 이사우리아 타우루스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테오도릭은 고트족 경쟁자가 있었는데 트리아리우스(Triarius)의 아들 테오도릭 스트라보(Theodoric Strabo)로 불리는 이로 트라키아 고트족의 지도자이자 동로마 실권자 아스파르와 사돈형제였다. 스트라보는 아스파르의 숙청에 대해 레오가 감당하지 못할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게 평화협정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냈다. 다음 황제 제노가 물러나는데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전 중 편을 바꾼 이사우리안 장군들의 이중의 배신에 좌우되어 퇴위도 되고 복위도 한 제노는 이들을 제어하는 일만도 골치가 아팠다. 한 때 황제의 동생을 볼모로 황제를 좌지우지하려 한 일루스(Illus)의 숙청은 488년에야 가능했다. 일루스는 과거 적이었던 레오의 미망인 베리나(Verina)와 안테미우스 전 서로마황제의 아들인 마르키아누스(Marcian)와 의기투합하여 레온티니우스(Leontius)를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두 테오도릭을 서로 싸우게 하면서 동시에 이들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계획을 세웠다. 동로마 황제를 돕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던 이 젊은 테오도릭 자신도 스트라보 처럼 동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며 스트라보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간다. 트라키아로 스트라보를 진압하러 갔다가 약속된 동로마 병력 충원을 받지 못한 데 분노하던 차에 ,동로마가 동족을 이간해 공멸케 한다는 스트라보의 말에 설득된 것이다. 분노한 고트족은 서로 화해하여 트라키아의 죄없는 농민까지도 잔인하게 학살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로마는 이 두 테오데릭을 달래느라 동로마 대장군에도 임명하고 기타 다른 회유의 관직이나 보조금 등을 약속하기도 하였는데 알라릭 역시 100년 전에 겪은 일이었고 실질적으로 얼마를 받든 약탈을 부수입으로 삼지 않으면 동족을 먹여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하여 겨우 하루하루 근근히 버틸 실속없는 일들이었다. 성실한 복무에도 제국의 연공은 넉넉치 못한데다가 서로 싸우고 시기하게 만드는 통에 테오도릭 자신이 어떤 생각을 품었을지 짐작갈 만하다. 비시고트의 알라릭에게는 물론이었거니와 오스트로고트의 테오도릭에겐 이탈리아는 미래를 기약할 만한 신천지였다. 

이탈리아 정복(493년)

당시 다키아(Dacia)와 판노니아(Pannoia)는 거의 버려진 불모지나 다름 없는 상태에서 불가르인, 게피대인, 사르마트인들이 테오도릭 행렬의 진군을 방해하였다. 새로 모습을 드러낸 불가르인과 두 테오도릭은 이미 적으로도 같은 편으로도 만난 적이 있었다. 스트라보가 사망(481년) 전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민족이지만 정확히 후대의 불가르족과 같은지는 불확실하다.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테오도릭은 줄리안 알프스(Julian Alps) 산맥을 내려와 이손조(Isonzo) 진을 친 오도아케르와 급히 전투를 시작했다. 서기489년 8월의 일로, 오도아케르는 패배 후 베로나로 후퇴하여 급류의 아디제(Adige) 강 등에서 방비를 강화하여 테오도릭에 맞섰으나  다시 패배하여 베네치아(Venetia) 속주를 잃고 말았다.

오도아케르는 라벤나(Ravenna)로 달아났고, 테오도릭은 밀라노(Milan)로 입성하였다. 오도아케르의 장군인 투파(Tufa)가 귀순하여 라벤나 공격을 맡게되었는데, 파엔차(Faenza)에서 다시 편을 바꾸는 바람에 테오도릭은 큰 위기를 맞는다. 이번에는 오도아케르가 다시 티키아(Ticinum) 즉 파비아(Pavia)로 물러난 테오도릭을 포위 공격하는 통에 브루군트인들이 인접 속주를 약탈해 간다. 이 때 잡혀간 이탈리아 인들은 수년 후 테오도릭이 치른 몸값으로 풀려난다. 설상가상 파비아 책임자 프레데릭(Frederic)이 주민 학대로 테오도릭의 책망을 받자 투파에게로 넘어가서 큰 위기를 맞는다. 테오도릭은 접전 중 동족인 비시코트인들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으며 다행히 두 배신자들의 분열로 오도아케르를 라벤나로 다시 물러나게 했다. 493년 평화협정을 맺고 공동 통치에 합의한다. 그리고 곧이어 라벤나에서 열린 연회에서 테오도릭이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이탈리아의 단독통치자가 된다.

만족의 왕, 로마인에겐 정무관

오도아케르나 테오도릭이나 (동)로마의 인정을 받은 정식 이탈리아 왕은 아니다. 테오도릭은 오스트로고트족의 왕이면서 이탈리아와 그에 속한 로마인과 만족들 모두의 실질통치자이지만, 관리 혹은 장군으로서  로마인을 왕으로서 동족인 고트족을 다스리는 형식이다. 아나스타시우스와 테오도릭은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독립국가의 원수이나, 로마 헌정에서는 국가 원수는 아나스타시우스 하나이며 테오도릭은 그 관리일 뿐이다. 스틸리코나 리키메르와 같은데 서로마 황제없이 동로마 황제만 있는 경우다. 491년 이미 테오도릭을 동쪽으로 보냈던 이사우리아인 황제 제노는 죽고 레오 황제와 베리나(Verina)의 딸인 아리아드네(Ariadne)가 형식상 재혼하여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가 황위에 올라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어정쩡하게 오도아케르에게 받은 서로마 휘장을 말없이 반납할 뿐이었다. 후에는 관례대로 양쪽에서 집정관 한 명씩을 뽑고 아나스타시우스가 재가하며, 원로원 의원 등의 사절이 오가는 등의 왕래가 있었는데, 위와 같은 테오도릭의 겸양이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테오도릭의 통치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테오도릭의 치세는 서기493년 부터 33년간 계속된다. 그 역시 이탈리아의 만족 왕으로서 아내와 두 딸, 누이, 질녀 들을 통해 프랑크족, 브루군드족, 비시고트족, 반달족, 튀링겐족 들의 왕가와 연결되었다. 아내는 프랑크족 클로비스의 누이며, 테오도릭 자신의 누이 아말라프리다(Amalafrida)는 반달족 왕과 결혼했고 전 남편 소생의 딸은 튀링겐족의 왕과 결혼했으며, 테오도릭의 두 딸은 비시고트 귀족과 브루군드족 왕과 결혼했다. 오도아케르 처럼 이탈리아 너머 알프스 동쪽에 대한 지배 역시 재확인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나아가서는 프랑크족과의 충돌로 나타났다. 클로비스의 알레마니 정복과 브루군트 정복이 미완이었던 한 이유가 테오도릭의 적절한 견제 때문이었다. 또, 판노니아로 나가 게피다이족을 물리치고 이곳을 예전의 서로마제국처럼 속주로 편입했다. 그는 알락릭 2세의 전사 후 후계가 거의 단절되자 섭정으로 비시고트의 스페인을 일시 병합하였으며, 브루군트족과 반달족과 의 결혼을 통해 그들에 대한 패권(hegermony)을 확립한 것이다. 

 테오도릭의 영향력

동로마의 견제와 질시 속에 고향인 판노니아 역시 영토에 병합시켰다. 게피다이족의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장군 피트지아스(Pitzias)와 문도(Mundo)의 훈족 연합군을 통해 불가르족의 도움을 받는 게피다이를 축출해 버렸다. 여기에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사위인 사비아누스(Sabinianus)도 격퇴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동로마에서 이탈리아를 칼라브리아(Calabria)아 아풀리아(Apulia)를 해상 약탈하게 되었고 테오도릭은 함대를 띠워 이에 맞섰다. 클로비스에 의한 비시고트족의 몰락은 오히려 그의 국제적 위신을 높였으며 프랑스 남부를 통해 스페인으로 연결된 비시고트 왕국의 어린 후계자의 섭정으로 다뉴브 중류에서 대서양까지를 다스렸다. 테오도릭의 제국은 그러므로 갈리아를 제한 서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고 다스렸으며, 자신이 황제를 칭하지 않았을 뿐 서로마가 망할 때와 달라진 것은 서로마 황제가 아닌 오스트로고트족의 왕이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로마인과 다른 아리우스파라는 것이나 만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권 과정에서 주교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이 주요 협력자들이었다. 오도아케르 때도 나왔던 3분의 1의 로마 땅을 만족에게 배분한다는 것도 통치와 관련된 의례적인 것으로 사유재산이 아니기가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토착 주민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과 같은 마찰을 빚을 성질이 아닌 것은 다른 만족 왕국과 다르지 않다. 로마인들의 이단 종파에 대한 반감과 달리 일반적으로 그렇듯 다른 아리우스파 통치자 처럼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던 교황 선출 등의 문제에 간여하였으며 통치자로서 교령 등의 문제에 간여하기도 했는데 로마 황제들에 비해 유별난 것은 아니다. 보통, 이단과 민족의 차이에 의한 갈등은 오히려 이교전쟁에서 적극적이었던 카톨릭 측이 아리우스파의 박해를 과장한 것이라고 한다. 제국은 이미 이단의 죄에 대해 사형으로 다스린 전례를 가지고 있었다. 카톨릭 교도들이 유태인 회당 등을 방화한 난동에 대해서 유태인 편에 서서 교회가 그 피해를 배상하도록 했다. 그의 종교관은 누구도 원치 않은 신앙을 강요되서 안된다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동서로마 교회는 단성론에 기운 동로마 황제로 인해 분열을 겪었는데 동로마 황제가 <헤노티콘〉(Henotikon)이라는 교령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와 함께 발표하여 양측을 중재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아카키우스 분열이 있었는데 이것이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519년에야 종식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민정은 예전처럼 로마인이 방위는 고트족이 담당하므로 민족간 충돌과 갈등의 여지가 많지 않다. 서로마 제국의 중요한 관직은 그대로 유능한 로마인들에게 맡겨졌다. 로마인의 제도를 그대로 잇는 다는 점은 프로방스(Provence)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프라이토리안 주(praefectura praetorio)의 주도(州都)가 있는 점에 착안 이를 살려 그 주를 복원했다. 이 주도의 관할 구역은 스페인은 물론 미수복된 전갈리아, 하드리아누스 장벽 이남의 브리타니아를 포함했다. 그리고 그 장관에는 리베리우스(Liberius)라는 오도아케르에게 끝깨지 절조를 지킨 로마인을 임명하였으며 후로도 그를 중용하였다. 집정관도 계속 뽑았으며 테오도릭은 부족법이 아닌 로마식의 테오도릭 칙령(Edictum Theodorici)을 공포하였는데 "칙령"이라 한 것은 형식상 로마의 국제를 존중하는 겸손에 해당한다.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해서는 극악한 폭군으로 비난한 프로코피우스 조차 테오도릭의 통치 방식은 제국의 가장 모범적 방식으로 여겼다. 그의 정부는 깊은 쇠퇴 중의 재건 사업에 효율성을 보였다. 테오도릭과 그의 관리들은 속주들의 단절 등으로 어려워진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의 피해를 받는 파비아 등에는 감세 조치를 취하고 건설토목 사업을 일으켜 수로를 복구하고 협치하여 다시 한번 로마와 이탈리아에 번영을 가져왔다. 이탈리아가 곡물 가격이 내렸고 로마시민에 대한 무료 식량 배분인 쿠라 안노아에(Cura Annonae)가 테오도릭의 로마 방문과 함께 재개되는 등 수출이 가능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개선되었다. 라벤나 등 많은 도시들에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졌고 수로 목욕탕 등의 시설이 정비 보수 되었다. 시민들은 극장에서는 키르쿠스 경기 등 로마 전통적인 행사들이 여전히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그 때문일까 서로마 멸후 있었던 전반적인 문화적 경제적 침체와 퇴조에서 이탈리아는 그 정도에 있어 지연이나 완화된 면이 있었다. 

테오도릭의 궁전을 묘사한 라벤나 San Apollinare Nuovo 성당의 모자이크 

서로마 멸후 일반적인 쇠퇴

서로마 멸후, 프랑크의 만족 왕실이 많은 고전 학교들을 방치하는 등 문화적 퇴조를 가져온 뿐만 아니라 주민생활 수준도 대체적으로 하향하였다. 실용성이나 장식에서 낙후한 제품들이 가정에서 이용되었고, 우수한 생산품들이 거의 더 이상 쓰여지지 않은 것은 물론, 설사 상당 기간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제품의 질이 저하되거나 생산 종류가 단조로와 졌다. 로마인들은 일반 가정에서 기와집이나 석재를 이용하였는데, 로마 멸후에는 진흙이나 목재들로 대체되었다. 고품질의 제품은 상류층에 제한 되었다. 기본적으로 화폐의 유통이 감소된 것으로 로마 멸후의 경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곳이 브리타니아였다면, 테오도릭 같은 훌륭한 왕들 덕분인지 이탈리아에서는 축소된 스케일이지만 로마 성시의 제품들이 다른 곳에 비하여 좀더 오래까지 공급되는 편이었다. 또, 도시 외곽 지대의 호화로운 시설과 장식물이 갖추어진 빌라 시스템이 점차 붕괴하는 것으로서 이 시기의 로마성의 상실을 단적으로 보인다. 

테오도릭의 과오: 보이오티우스의 죽음

이런 테오도릭의 유일한 오점은 자신의 신하인 보이티우스(Boethius)라는 또 다른 최후의 로마인에 가한 박해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로 그리스 유학 후 귀국한 이래 어린 나이에 원로원 의원이 되어 테오도릭에게 출사하였다. 만년의 테오도릭은 동로마의 수상한 동향(아리우스파에 대한 탄압)에 무척 예민하여져 있었는데 마침 알비누스(Albinus)라는 의원이 동로마와 교신하면서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고발되자, 이릉을 변호하는 사마천 처럼 왕실 회의에서 그는 옹호한다. 

 "만일 알비누스가 유죄라면, 나와 모든 원로원 의원 역시 유죄입니다. 폐하"  

테오도릭의 입장에서는 거슬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전의 그의 태도와 달리 용서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이티우스 그로 인해 파비아(Pavia)의 탑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중세 시대 내내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것을 종교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는 순교라 하며 보이티우스를 순교자로 부를 수 있고 동양식으로는 열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시절 변덕스런 마음에서 로마의 자유를 희망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 회복은 이탈리아에 재앙이 되었던 것이다. 보이티우스의 경우, 그는 결국 처형되었지만 그의 책은 살아남아 중세의 암흑 속에 계속 빛났다는 점이 역시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여기에는 후계구도의 실패가 두드러졌는데 이는 동로마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519년 집정관이 되는데 그 공동집정관이 에우타릭(Eutharic)이었고 둘 다 동서 로마의 후계자로 당시의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과 3년 후 에우타릭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사망한다. 이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리우스파를 탄압해 테오도릭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 때문에 교황 요한 1세는 동로마와 통모했다는 혐의로 라벤나에 구금된다. 

라벤나에 있는 테오도릭의 영묘

만족 법전

이 시대엔 만족의 법이 조야한 라틴어 또는 게르만어로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프랑크 족은 살리 법전과 리부아리안 법전에 브루군트족은 브루군트 법전에 구속될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역시 모국어 성경을 가진 고트족 에우릭 왕(재위466 –  484)의 법전(Codex Euricianus)으로 다른 프랑크의 부족법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 다음은 브루군트 왕국의 군도발트의 브루군트 법전(Lex Burgundionum)이 있다. 만족법은 고대 야만시대의 관습법의 소박함을 가진 것 같고 어떤 것은 웃음을 짓게 하는 것도 있으나 그 나름 각 부족생활에 있어서는 실용적인 규정이다. 브루군트 족 법전은 정복자와 갈로로마인 간의 위화감을 누그러 뜨릴 의도로 편찬된 면도 있다. 만족법은 계급적 구분을 두어서 신에게서 유래한 혈통 등을 따로 구분해 차등을 둔다. 또, 형법적 성격이 약하여 속죄금으로 배상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에 의해 신분에 따라 다른 사람의 값이 매겨진다. 최고 프랑크 귀족을 살해해도 600매의 금화로 속죄되고, 로마인은 100매 정도면 충분하며 다른 형벌을 받지는 않는다. 문제는 다소 유치한 법규정이지만 엄연히 법정이 있고 소송이 제기되면 나름대로 지방관의 책임하에 증거가 조사되고 심리가 이루진다는 것이다. 무죄의 증거로 무죄를 보증해 줄 증인의 수(數)를 요구하였는데, 결국 오늘 날로 보면 탄원서를 써준 사람의 수가 일정 수를 넘으면 즉 100장의 탄원서는 무죄 증거가 되는 것인 듯하다. 이런 불완전한 증거들은 당연히 보다 엄밀한 증거 보완이 필요하지만 그래서 만족 관리들은 시죄법이나 결투법 같은 것을 도입하였다고 기번은 설명하고 있다. 법정에서 시죄나 결투를 통해 유무죄를 증명하라는 것이다. 만족의 법률이 유치하고 때론 가혹한 듯하나 오늘날의 법정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판관이 자기의 취약성을 알고 화해를 권하는 외에 다른 적극적 개입을 꺼리는 것이다. 그리고  소송절차의 번거로움이나 형평 때문에 약자가 권리 찾기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은 만족이나 로마인의 법정 그리고 고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프랑크 족의 잔인한 보복 예를 들어 우물에 빠뜨려 시기스문트 일가를 죽인 것 같은 것이 시죄의식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다행한 것은 만족이 각 부족법에 적용을 받는 것 처럼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로마법의 적용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통치 

클로비스가 비시고트 왕 알라릭 2세를 죽이고 갈리아를 차지하자 비시고트의 중심은 스페인으로 옮겨지고 그 합법적 계승자는 알라릭의 적자인 아말라릭(Amalaric)이었다. 테오도릭은 이 외손자의 섭정이되어 서자로 비합법적인 게살렉(Gesalec)을 쫓아버리고 그의 장군들을 스페인에 파견하여 통치하며, 발티가 마지막 왕인 아말라릭이 프랑크 침입 중에 죽자 파견된 오스트로고트 족 장군 테우디스(Theudis)가 왕위에 오른다.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하는 프랑크족의 통치에 비하여, 비시고트 족의 스페인 통치 역시 모범적인 편이었다. 세속화가 두드러진 프랑크 성직자들에 비해 스페인의 성직자들은 대중들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레카레드(Reccared) 왕 부터 톨레도 (종교) 회의가 120년간 16회 소집되었는데 이것이 스페인의 입법의회 구실을 했다. 전국의 주요 주교들이 모여 엄숙한 절차를 통해 회의를 진행하고 제4일 째부터 비시고트의 귀족과 고관이 입장하여 회중의 동의 하에 교령을 승인한다. 왕은 세습이 아닌 귀족선출제였으며, 이 회의를 통하여 톨레도에서 톨레도 주교의 도유식을 받아야 하게 된다. 제정한 교령의 불편한 점들이 연례의 교회회의에서 또 토의 검토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이탈리아

테오도릭 이후의 고트 왕가는 로마인과의 동화 기운이 강해졌고 테오도릭의 딸은 아들이자 테오도릭의 손자 아탈라릭(Athalaric)의 섭정으로 아들에게 로마의 현군들을 본받기를 바랬다. 아탈라릭 사후 그녀의 실권(失權)이 동로마와 유스티니아누스의 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결국 분열된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재정복해 알프스 이북을 제외한 로마 영토를 모두 수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비시고트와 마찬가지로 토틸라 같은 장군들이  동방의 침략에 맞섰다. 유스티니아누스를 생각하면 히포드롬에서 벌인 학살을 생각하는데 경기나 히포드롬 자체도 오늘날의 스포츠와 비슷하지만,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당파가 곧 정치당파가 되어 부유한 사람들의 청색당과 그렇지 못한 녹색당이 대립하고 황제까지 그 인기에 영합하였던 것 등등도 오늘날의 모습과 비슷해 보여 씁쓸하다. 로마는 벨리사리우스를 맞이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지만 고생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로마를 회복시켜 주지 않고 라벤나에 총독부 하나를 두었고 국토는 황폐화 되어 랑고바르드 족의 침입까지 받고 분열된다.  

그리하여 기번은 쇠퇴가 시작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으로 부터 바로 유스티니아우스 제의 찬란한 업적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뒤로는 동로마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의 서방의 세계사를 조금은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으며, 다시 시작 부분을 보면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은채 오현제 까지 제정초기를 역시 간략하게 살펴본다. 이렇게 해서, 로마사를 앞 맥락은 끊어놓으니 로마사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마의 흥망성회 원인론>이 기번 책에 영햐을 주었다고도 하나 반드시 그 때문에 쇠퇴기 부터 시작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쓰고자 하는 야심이나 혹은 다른 이유도 이런 책의 분량 할당과에 대해 있을 것 같다. 다시 나만의 로마사를 쓴다면 신석기 시대 부터 이탈리아에 첫 농경민들이 들어온 시기부터 양치기 로물루스가 일곱 언덕의 로마에 정착하게 되어 7왕대로 부터 초기 소박한 공화정으로 부터 다시 시작해 보고 싶기도 하다. 




서로마 이후의 이민족 왕국 (1) <로마제국쇠망사 77> 로마제국쇠망사



서로마 제국이 멸망 후 그 쇠퇴와 더불어 성장한 게르만족들의 수중에 로마제국이 분할된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에 관한 장을 시작할 때, 기번은 타키투스가 기록한 다음의 말로 시작하고 있다. 

"공화국의 보호로 갈리아는 외우내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민족적 독립은 잃었지만 대신, 당신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칭호와 특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우리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은 시민정부가 주는 항구적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정복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우리는 당신들의 보전을 위해 필수적인 세금을 부과하는데 만족하여 왔습니다. 평화란 군대없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군대는 민중의 노력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흉악무도한 게르만족으로 부터 라인 국경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섭니다. 그들은 언제나 갈리아위 부와 비옥함 대신 자기들의 황량한 숲과 늪지를 바꾸려고 기도하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속주엔 치명적이될 것이며 당신들은 800년의 지혜와 용기로 세워진 강한 조직의 폐허 속에 묻히게 됩니다. 당신들의 헛된 자유는 야만인 정복자에게 억압될 것이며 로마인의 축출은 야만인 정복자의 횡포로 이어질 것입니다."   

게르만인들을 경계의 눈으로 보던 타키투스가 이미 로마의 멸망이 갈리아에 대한 게르만족의 지배로 이어질 것이라 예언하였는데 이미 로마의 지배가 성하던 이 시대의 뜬금없는 예언이 근 400년 후엔 그대로 실현되었다.  

<로마 제국 멸망 당시의 상황>


비시코트 왕 에우릭(Euric)

이민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서로마를 멸망시켰을 때, 자신은 "이탈리아의 왕(King of Italy)"로 지배하였다. 그 당시 이미 비시고트 족이 갈리아의 아키텐 지방에 이미 확고하게 자기 민족의 나라를 세워 호노리우스 황제의 인정을 받았으며, 오도아케르 자신도 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원했다. 그는 서둘러 비시고트의 군주 에우릭(Euric)을 인정하여 알프스 너머의 땅은 포기하였다. 로마인들도 가론강 유역 툴루즈 궁정에 문전성시를 이루며 그의 왕국의 통치를 도왔다. 에우릭 왕은 오도아케르 뿐만 아니라 로마 국경 내외의 게르만족들로 부터 위신이나 신망이 대단하여 가까이는 브루군드인과 프랑크인들이 그의 하위 동맹을 자인하였으며 멀리는 바다건너 반달족과 주변민족과 갈등을 겪는 변방의 색슨족과 오스트로고트족 심지어 동로마제국이 그의 원조를 기대하였다.

갈리아 지배에 대한 오도아케르의 축복과 응원이 진심이든 아니든 에우릭 왕 혹은 그 선대 와들이 갈리아를 통일할 야심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이 당시에는 그 성취가 가장 유력시되는 만족이었다. 에우릭은 테오도릭 왕의 아들로 형인 테오도릭 2세를 죽이고 즉위한 후, 스페인과 갈리아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갈리아 북부로, 선대의 오를레앙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여 론강 상에서 동로마계 황제인 안테미우스가 불러들인 브리톤족과 싸워 이겼으며, 남쪽으로는 아를르( Arles)와 마르세유(Marseilles)까지 정복하였다. 아더왕으로 동일시되는 인물중 하나인 브리톤왕 리오타무스(Riotamous)가 바로 이 때 기록에 등장한다. 황제의 아들 안테미올루스 역시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단, 오베르뉴(Auvergne) 만은 클레르몽의 주교가 되어 있던 시도니우스 아폴라리우스와 그의 사돈 형제로 사병을 이끌던 엑디키우스(Ecdicius)가 전력으로 침입을 막았다. 동로마를 배경으로 475년 즉위한 네포스 황제는 파비아 주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of Pavia)를 보내 에우릭과의 협상하여 고트족에 강력히 저항하는 오베르뉴와 에우릭에게 정복된 프로방스를 맞바꾸고 고트왕국의 독립과 스페인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지었다. 에우릭 사후, 이 상황을 뒤집고 정작 갈리아 지역의 주인이 되었던 것은 게르만 족의 다른 일파였던 프랑크 족으로 그들의 이름을 프랑스의 국명에 남기게 되었다. 

수아송 왕국과 프랑크 왕국

프랑크족은 게르만족의 이동이 일으킨 3세기의 위기에 나타난 바, 기번에 의하면 대 게르마니아(Magna Germania)에서 몇몇 부족들의 이합집산으로 결성된 유력한 연맹체로 그 족명이 되는 "프랑크"는 "자유(自有)"라는 고귀한 단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 라인 국경 내 톡산드리아(Toxandria)에 정착을 율리아누스 황제로부터 허락받았고, 로마 멸망 즈음 15세 나이의 클로비스(Clovis)가 아버지 힐데릭(Childeric) 왕을 계승하였을 당시(481년) 갈로로만 주교들로부터 "벨기카 세쿤두스(Belgica Secundus)"의 지배자로 인정받았었다. 아버지는 튀링겐족(Thuringians)에게로 추방당하였을 때 알게된 여왕과 사통하여 클로비스를 낳았다. 적어도 아버지 힐데릭은 아에기디우스의 휘하의 만족 왕으로 로마 방위라는 본분으로 종신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당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 조차 아닌 이교도(pagan)로 자신의 조상신을 숭배하였다. 클로비스는 경쟁자인 시아그리스(Syagris)의 수아송 왕국을 물리치고 갈리아의 신흥 할거세력으로 떠올랐다. 시아그리스는 반달원정에서 마조리아누스 황제를 돕던 아에티우스의 부하 출신의 아에기우스(Aegidius)를 계승하였다. 투르의 그레고리(Gregory of Tours)로 부터 "로마인의 왕(King of the Romans)"으로 불린 갈리아의 로마식 지배자이자 달마티아로 달아났던 또 다른 마지막 황제 네포스 사후로는 로마의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클로비스는 그의 이교도 동족과 친척들을 수와송 왕국의 전리품 배분을 미끼로 규합해 시아그리스 타도에 나섰다(486년). 클로비스의 정식 도전으로 전투 장소를 수아송으로 결정했고, 이 전투에서 시아그리스 패주하여 양자의 앙숙이었던 비시고트족의 툴루즈 궁정으로 도주 후 클로비스에게로 송환되어 처형되게 된다. 

알레마니 전쟁(496년)

클로비스가 정복사업에 나선 것은 알레마니족에 대해서다. 알레마니 족 역시 3세기 위기에 나타난 연맹체로 라인과 다뉴브 방어선의 중간 지대에 로마가 포기한 땅인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를 점거하고 있었던 것은 유명하였고, 이 당시 현 알자스-로렌 지방까지 확장하였다. 최근 누이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시집보내 이탈리아의 왕 테오도릭(Theodoric)과 사돈지간이 된 클로비스는 그의 동족인 리푸라리안 프랑크족(Ripuarian)이 콜론(Cologne)에서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구원에 나서 톨비악(Tolbiac) 평야에서 맞섰다. 처음에 클로비스 군이 패하여 도주하자 알레마니왕은 이를 급히 추격하다가 반격을 받고 전사하였으며 알레마니족은 클로비스에게 항복하였으며 나라는 영구히 제거되었다. 이 승리는 후대 프랑크 왕국이 엘베까지 게르만족을 복속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카톨릭 개종과 부르군트 전쟁
 
클로비스는 브루군드족의 왕가의 클로틸다(Clotilda)와 결혼했다. 브루군트족은 비교적 후대에 도래한 게르만족 일파로 경내 라인란트에 거주하였으나 아에티우스(Aetius)에게 패하여 론강 쪽으로 남하 정착하여 브루고뉴라는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종족 역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었으나 카톨릭적 환경 속에서 교육되었던 클로틸다는 이교도 남편의 카톨릭 개종을 부추겼으며, 마침내 클로비스는 선대로 믿던 조상신 등을 버리고 종자들과 개종케한다. 군데릭(Gunderic)의 사후 브루군트 왕국은 4형제에게 분할되었고, 내분이 있어 그녀의 아버지인 힐페릭(Chilperic)이 삼촌 군도발트(Gundobald)에게 제거된다. 군도발트는 이탈리아의 실질 지배자인 리키메르와 긴밀히 협력하여 안테미우스(Anthemius) 황제를 제거하고 리키메르 사후 이를 계승 후임 황제 글리세리우스(Glycerius)를 세웠으나, 동로마의 간섭으로 이탈리아 일을 버려두고 귀국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클로비스는 그 막내인 고데게질(Godegesil)을 도와 군도발트를 아비뇽까지 쫓아냈다. 후자는 클로비스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목숨과 영토를 가까스로 보전하였다. 이 전쟁에서는 최근의 개종이 어느 정도 힘이 되어 있었고 브루군트의 주교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군도발트는 클로비스가 물러나자 조공 약속을 어기고 비엔느 성을 함락 후 고데게질을 살해하고 그 영토를 아들 시기스문트(Sigismud)에게 물려준다. 

고트 전쟁과 클로비스의 최후(507-508년)

이제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어야 할 상대는 루아르 동쪽의 비시고트족임이 분명하였다.  에우릭은 서로마 멸망의 혼란을 놓지지 않고 론강 이동의 마르세유 등 프로방스 지역을 다시 차지하고, 수에비 족을 갈레시아 일부로 밀어내고 스페인 전토까지도 병합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더불어 그는 로마적 전통을 이해하는 개화된 이민족 군주여서 많은 갈로로만 귀족들을 궁정에 받아들였다. 불행한 것은 돌연한 죽음으로 갈리아 통일의 과업을 마치지 못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즈음 오스트로고트족의 테오도릭이 오도아케르를 대치하여 인근 야만왕국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물밑 외교전을 촉진했다. 테오도릭의 파비아(Pavia) 포위를 동족으로서 에우릭의 후계자인 아들 알라릭(Alaric)이 도운 것이다. 군도발트의 첫 며느리와 알라릭의 아내는 테오도릭의 딸들이었다. 두 경쟁자인 클로비스와 알라릭은 처음으로 국경인 루아르 강 상의 앙브아즈(Amboise)에서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만났으며, 두번재로는 부이에 전투(Battle of Vouillé)에서 만났다. 클로비스는 함꼐 개종한 그의 동족들에게 아리우스파 이단의 지배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은 후 거병하여 루아르를 건너 아키텐으로 쳐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라바룸 군기를 든 것에 비할 순간이다. 프아티에(Poitiers) 인근에서 비엔강이 물이 불어 진군이 지체되어 강 맞은 편에 진을 친 고트족과 마주했다. 프랑크 군은 아리우스파 지배에 불만을 받은 현지인들의 음양의 원조를 받은 것으로 보이나, 유명한 시도니우스 아폴로나리스의 아들인 클레르몽의 아폴로나리스는 오베르뉴 군대를 이끌고 고트군을 도왔다. 루아르강 도하에서는 오를레앙 사람들에게 다리를 제공받았고 현지 프아티에서는 농민들로 부터 여울목을 귀뜸받았다. 사실, 이 오를레앙에는 로마가 아직 망하기 전에 형 상황에서 중요해진 인물들이 맞서 거대한 전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에기디우스와 비시고트족이 맞붙어 싸운 곳인데 결과는 수아송 왕국이 고트족의 확장을 막아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에 힐데릭이 로마인 편에 섰다. 비시고트 왕제 프레데릭은 전사하였다. 이 싸움은 마조리아누스 황제가 리키메르와 갈등 끝에 제거되는 와중에 아에기디우스와 로마 장군 아그리피누스(Agrippinus) 백(伯)의 불화와 고트족의 영토확장욕이 얽혀 일어났던 일이다. 색슨족을 이끌고 침입한 아도바테르란 인물과 고트족과 맞서는 브리톤족도 등장한다. 아무튼, 테오도릭의 오스트로고트 원군을 기다리던 고트 진영은 초조해져서 퇴각을 준비하였다가 프랑크군의 습격을 받는다. 아폴로나리우스의 장수들이 모두 살해되자 고트족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상에서 클로비스와 알라릭은 일대일 결투를 버리고 여기서 알라릭이 클로비스의 창에 쓰러지고, 클로비스 자신도 충성스런 고트 신하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다. 서기 507년 이 승리로 말미암아 클로비스가 한탄한 대로 이듬해 508년 루아강 이남에서 이단 종파의 통치에 신음하는 갈리아를 해방한다.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이 전쟁 후 클로비스의 이 업적을 칭찬하여 로마 집정관의 영예를 부여했다. 다만, 정식 집정관 목록인 파스티(Fasti)엔 올라 있지 않지만 클로비스는 이것에 대해 자부하였다. 고트족의 지배지는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의 셉티마니아(Septimania)의 좁은 해안로 축소된다. 클로비스는 511년 파리에서 사망한다. 

브루군트 정복

브루군트족의 최종 정복은 후대에 클로비스의 사후에 달성되며, 브루타뉴(아르모니타) 정복도 불완전하였다. 클로비스가 완수한 것은 고트왕국 축출인 셈인데, 이는 공교롭게도 선대 이래 로마 장군으로서 부 힐데릭의 주사업이었다.  군도발트의 아들 시기스문트는 테오도릭의 딸인 죽은 전처 소생의 시게릭(Sigeric)을 후처의 모함으로 죽게 한 과오로 괴로워 하다가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523년 클로틸드는 프랑크 왕국을 4분한 네 아들 클로도메르(Chlodomer), 힐데베르트(Childebert I), 클로타르(Clotaire I), 테우데릭(Theuderic I)에게 때늦은 아버지의 복수전에 나서게 한다. 전투에서 패한 후, 시기스문트이 가족들은 클로도메르에게 사로잡혀 오를레앙에 유폐되고 동생 군도마르(Godomar)는 이후 나라를 다시 회복한다. 이를 경계한 크로도메르는 동생 테우데릭의 장인이었음에도 시기스문트와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테우데릭과 함께 다시 브루군트 원정에 나선다. 아버지 군도발트를 계승한 시기스문트는 아버지 대 부터 봉사해온 비엔느의 주교 아비투스(Avitus, bishop of Vienne)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 개종했었는데 이로 인해 "순교자" 또는 성인으로 기려지게 된다. 군도마르의 죽음과 함께 브루군트 왕국이 망한 것은 534년의 일이다. 동방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도 알프스 이북의 프랑크 지배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중심에 프랑크 왕국은 확립된다.

망진자는 호르사, 브리타니아

클로비스 흥기했던 지역의 배경으로 보면 갈리아 북동부를 중심으로 무덤 출토물 등에 주민의 무장화 경향으로 만족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르네(Tournai)에 있는 힐데릭의 무덤에는 여러가지 화려한 부장품과 "CHILDIRICI REGIS"(힐데릭, 왕)이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Tours)의 말을 빌리면 힐데릭을 추방한 것은 수와송 왕국의 아에기디우스였던 것과 그도 프랑크인의 왕이었다는 것을 보면 클로비스나 시아그리우스나 이 지역의 만족을 기반으로한 경쟁자로 생각된다. 수와송이 병합되자 프랑크족은 근거지를 파리로 옮긴다. 고고학적으로 브리타니아의 상황을 보면 북동 갈리아의 상황을 복제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브리타아에서는 로마문명이 거의 절멸하는 더 심각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였다는데 토족 브리튼족(Britons) 왕의 바보같은 선택 때문에 역사가 완전히 거꾸로 선 경우라고 드물게 남은 문헌은 탓하고 있다. 기번은 픽트족이나 스콧족과 같은 하찮은 만족을 방어한 답시고 더 사나운 호랑이를 집안으로 끌어들인 경우에 비한다. 로마의 방어 시스템은 원래 하드리아누스 장벽 너머의 민족을 방어하는 것이 주인 점에 착안 로마 정부와 수비대의 철수로 공백이 생긴 북방의 방어를 위해 보티건(Vortigern) 왕은 바다 건너 게르만족을 끌어들여서 이를 막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후기 해양민족의 약탈을 막기 위한 해안 방어는 까맣게 잊은 채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 외래침입자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것이다. "덤앤더머"와 같은 왕과 용병들로 인해 이 처럼 어처구니 없는 로마문명의 절멸이 시작되었다. 주트족 용병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는 동남부 사넷섬(Isle of Thanet)을 할당받고 얼마간 브리톤 군주를 위한 봉사를 하다가 자신의 종족의 왕국을 세울 야심을 키우고 마침내 브리톤족을 물리치고 켄트(Kent)를 근거지로 삼았고, 색슨족은 동 색슨(Essex), 서 색슨(Wessex), 남 색슨(Sussex)에 앵글족은 이스트앵그릴아(East Anglia), 머시아(Mercia), 노썸브리아(Northumbria)에 기반을 잡아 이들을 앵글로-색슨 7왕국(Heptarchy)이라 한다. 아그리콜라가 북해안을 모두 탐험한 뒤 로마적 신중함으로 북방의 칼레도니아인 등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세워주었는데, 망진자는 호야가 아니라 호르사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웠주었는데, 밀려난 브리톤은 웨일즈 외에도 콘월 등을 통해 프랑스의 브루타뉴와 수에비족의 스페인 갈레시아 왕국의 브리토니아 등에 자취를 남기고 있다. 후에 유력한 왕국과 왕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상당기간 이들을 하나로 묶는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 전도한 성 패트릭 등 켈트인의 기독교가 남아 있었기는 하지만, 앵글로 색슨족의 성장과 함께 로마식 기독교는 잊혀져 있었다. 59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보내 선교를 시작하는데 그가 켄터베리의 첫 주교다. 

역사를 거꾸로 돌린 만족의 통치

특히, 프랑크족의 통치에 관하여 기번은 "무정부와 무지의 1000년"이라했는데 문명과 문예의 퇴조를 말한다. 학술은 부진하였고 행정과 사법 분야에서 수세기간 정련되어온 로마적 합리성이 만족들의 조잡하고 폭력적인 관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였다. 행정과 군권을 다시 통합하여 지방의 백(伯)에게 맡겨 로마식 통치를 근근히 계속됐으나 주먹구구식으로 바뀌었는데 극단적 예로 조세제도가 사악하고 불길하다고 장세장부를 불살라 버린 것이다. 왕의 저택은 농장과 같아 들과 가축을 키우는 마굿간 등이 있고 채소도 심고 사냥과 낚시를 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그에 필요한 직인 가족들도 함께 생활하고 왕은 있었다. 남은 것은 시장에 팔거나 왕에게 봉사한 자들에게 하사했다. 왕과 귀족의 취미는 수렵인데 그들의 사냥터에 들어와 일반 백성이 짐승을 잡는 행위는 사형으로 처벌되나, 귀족이 그들을 살해했을 때는 가벼운 벌금에 그쳤다. 이 정도라면, 캘리그라퍼(calligrapher)란 별명이 붙은 말기적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와 메로빙거 말기의 왕들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뵌다. 야만성이 뒤섞인 프랑크 궁정의 분위기는 아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어린 푸이가 처음 호출되던 청조와 비슷했을 것 같다. 이곳의 집사인 궁재가 훗날 왕국의 재상이 되어 국권을 메로빙 왕가로 부터 탈취하여 카롤링 조를 연다. 왕국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재산 처럼 생각하여 왕의 사후 아들들에게 분배했다. 그로부터 네우스트라시아(Neustria),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같은 구별이 생겼다.  게르만족은 그 풍속에 부족의 민회(民會)를 가지고 있었고 그 민회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국왕에 대해 국왕 선출권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품평에 중요한 것이 햇빛을 상징하는 긴 머리와 혈통이었다. 이 마저 갈리아 정복 후에는 없어졌다. 



<메로빙조의 왕국들>

이로 인해 프랑크 족 왕들은 클로비스 당대로 정적에 대해 잔인했고 궁정의 시기와 암투가 심하였다. 네우스트라시아 왕 힐페릭 1세의 세번째 처 프레데군드(Fredegund)는 후궁이나 왕비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왕 사후 아들 클로타르 2세의 섭정이 되었다. 왕비가 되기 위해 전 왕비를 모함하고 그 아들들과 함께 죽였다. 스페인 비시코트의 왕녀들이 힐페릭의 형제와 결혼하였는데, 브룬힐다(Brunhilda )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가 되고 갈스윈다(Galswintha)가 힐페릭의 후처로 네우스트라시아의 왕비가 된다. 갈스윈다가 살해되고 프레데군드가 그 뒤를 잇자,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라시아는 40년간 원수가 된다. 프레데군드는 왕가에 일어난  암살과 살인에 관해 수많은 괴담을 남겼고 심지어 친딸도 시기해 죽이려 했으며 어린 아들도 죽도록 방치하려 했다고 한다. 외정 뿐 아니라 프랑크 왕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에서 군사들은 군기가 문란하여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았으며, 십자군 때까지도 그 면에서 악명을 떨쳤다.

일반적으로 게르만 왕국과 토착 로마인의 갈등은 종파적 차이에 의해 과장된 것이며 프랑크의 경우도 후대에 심화된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과장된 것이기 쉽다. 물론 정복으로 클로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로마의 영토를 재산처럼 분배하였던 것은 맞지만, 이 토지는 개인의 사유지와는 다른 공(公)적인 성격이 있는 토지였을 것이다. 기번은 사유지인 알로디움(allodium)과 살리카 토지(Sallic land)로 구분하였는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직자와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땅에 대해서는 면세와 상속 등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때로 그것이 은사(benefice)라는 형식이 되어 왕에 대한 봉사의 댓가로 지위나 공적에 따라 내려졌을 때 은대지(恩貸地: beneficium)로 되었다. 초기에 은대지는 왕에 대한 봉사에 고정된 규칙없이 지급되었다가 다시 거두어지는 것으로 마치 중세의 윤작과 같이 고정성이 없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 게르만의 종사제(從士制)와 결부된 것이었고, 카롤링거 조로 접어들면서 중세적 특징인 봉건제로 발전하여 영주는 불입권을 갖고 봉지를 세습화한 것이다. 














19세기 문학 속에 '진보' '민중'



있고 진보라는 말 자체가 사기다라는 말이 있고 그에 대한 불신의 말이 많은 듯 하다. 가령 자유에서 유래한 리버럴이란 말을 진보로 번역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최근에 급조된 말이라 해서 그런가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프랑스 혁명이전 부터 쭉 쓰이던 말인 듯하다.


어린 시절 동화로만 알고  '장발장'이 나오는 레미제라블을 다시 읽다 보니 이것이야 말로 정통 역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고, 장발장이 활동하던 프랑스혁명기의 정치에 대해 꽤 자세히 언급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서 주요 포커스는 장발장이란 인물에 있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에 대한 해설이나 평가를 더 중시하는 우리 나라의 대하역사소설과 다른 점인 것 같다. 이만 하면 서양 기준으로는 역사소설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7월 혁명이나 2월 혁명 전후에도 프랑스의 크고작은 혁명열로 인한 소요는 계속 있었던가? 아무튼 1832년을 설명하면서 'liberal'이 아닌 불어 ' progrès'란 이름으로 진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당연히 민중을 의미하는 'populaire'라는 단어가 혁명에 대한 설명에서는 ' progrès'와 함께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보인다. 당연히 민중 혹은 국민을 참칭하는 가짜로서 민중과 대립하는 편에 부르조아지가 있다.

죽은 자와 산자를 논하면서, 진보를 '신(神)'과 혼동하는 사람을 나무라기도 하는데 단호히 진보를 '인간(人間)'의 상태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진보는 진짜국민인 '민중의 영원한 생명(La vie permanente des peuples)'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진보나 민중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이후로 부터 계속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왔던 것 같다. 사실, 19세기의 정치사를 알면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인 것이긴 하지만.
  



좀더 훗날의 이야기를 하자면 위고는 고상한 반란인 '혁명'은 전체에 의한 것이고 소수당의 반란은 '폭동'이라고 구분하는데 이 기준에서 1917년의 '진보'를 볼 것 같으면 부루조아지가 가짜국민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수파인 볼세비키의 정변으로 볼 수 있겠다. 위고의 말이 유치한 이명준 수준의 몽상가의 말같기는 하지만 어찌보면 1917년의 일을 미리 예견하고 마치 뒷 날의 그 일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듯하다.  

로마의 콜로나 가문과 우르시니 가문 인문

제11세기 초두, 伊太利(이태리)는 君主(군주)에게나 民衆(민중)에게나 한결같이 억압적인 봉건적 暴政(폭정)에 노출되었다. 人間(인간) 본연의 권리들은 수많은 共和國(공화국)들에 의해 옹호되었고 곧 그들이 자기들 자유와 지배를 도시로부터 인접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貴族(귀족)들의 劍(검)은 부러졌고, 그 奴隸(노예)들은 解放(해방)되었으며, 그들의 城郭(성곽)은 헐리고, 이제 사교와 복종의 습관을 들였고, 자신들의 야망을 자치체의 영예직에 한정시켰으며, 베니스와 제노아의 자부심 강한 貴族政治(귀족정치) 상에서도 각 파트리키아누스 家門(가문)이 법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질서한 로마의 政府(정부)는 내부의 반란적 후예들을 요리할 일을 감당치 못해, 반도들이 성벽 안팍에서 政務官(정무관)들의 권위를 비웃었다. 이는 政權(정권)을 위한 貴族과 平民(평민)간 싸움은 더이상 아니었다.  豪族(호족)들이 무장하며 獨立(독립)을 선언했고, 그들의 宮殿(궁전)과 城砦가 포위에 대비 강화되고 이들의 사적인 싸움이 수많은 封臣(봉신)과 從士(종사)들에게 맡겨졌다. 출신과 정서 상으로 그들은 그 지역에서 외지인이였고 진짜 로마인이라면 市民(시민)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자칭 로마의 君主로 칭하는 이런 오만한 이방인들을 외면하였을 것이었다. 일련의 검은 革命(혁명)들이 지난 후 族譜(족보)란 것들은 죄다 망실되었고, 家門의 이름들은 없어지고, 血族(혈족)의 혈통 수천 갈래가 한데 뒤섞였다. 고트族(족)과 롬바르드族, 희랍族과 프랑크族, 게르만族과 노르만族이  王家(왕가)의 恩賜(은사)나 勇猛(용맹)이라는 特權(특권)을 통해 가장 좋은 소유권을 얻어갔다.  이런 예들이 추정될 만한 것들은 널렸지만, 히브리人(인)이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 직위까지 올라선 것이 이들 비참한 유랑 망국민들의 긴 幽囚(유수) 속에서는 비길 데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레오 9세 시대에 한 부유하고 학식있는 猶太人(유태인)이 基督敎(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의 代父(대부)인 당시 敎皇(교황)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레오의 아들 피에트로(Peter)의 열정과 용기가 그레고리 7세의 대의에 두드러지며, 교황은 이러한 그의 충직한 지지자에게 하드리아누스의 靈廟(영묘)와 크레스켄티우스의 塔(탑) 즉 소위 산탄젤로城(성)의 통치를 위임했다.  父子(부자) 양쪽이 무수한 자손을 가졌다. 고리대의 수익인 그들의 富(부)는 도시의 최고 귀족가문에게 배분된 채 광범위한 동맹자들을 끌어들여, 이 改宗者(개종자)의 손자는 성베드로의 玉座(옥좌)에 오르는데 조상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다수의 성직자와 민중이 그를 지지했다. 바티칸에서 수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아나클레투스(Anacletus)에 對立敎皇(대립교황)이란 칭호가 붙이게 된 것은 겨우 성베르나르(St. Bernard)의 언변과 이노켄티우스 2세의 최후의 개선에 의해서 일 뿐이었다.  그의 패배와 죽음 이후로는, 레오의 후손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 현재 야심만만한 貴族 중에 猶太 혈통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에 몰락하거나 현재까지 변형된 영화를 이어가는 가문들을 거명하는 것이 著者(저자)의 계획은 아니다.  프란지파니家의 오랜 집정관 가계는 기근시대에 빵을 쪼개 나누어 먹은 인심 속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고 이런 자선은 그들의 동맹이었던 코르시(Corsi)家와 함께 요새들로 둘러 싼 도시 내 넉넉한 공간에 문을 걸어잠근 것 이상의 진정한 영광이다. 사비니族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벨리(Savelli)家는 옛 존엄을 유지해 오고 있고, 카피주치(Capizucchi)家의 낡은 칭호는 첫 원로원 의원들의 동전에 새겨졌다. 콘티(Conti)家는 시그니아(Signia)의 백작들의 영지 없는 영예를 보유하고 안니발디(Annibaldi)家는 카르타고 영웅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아주 무지하거나 아주 평범해졌을 것이다. 

도시의 동료나 군주들 중에 콜로나(COLONNA)와 우르시니(URSINI) 家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들의 가문의 이야기야 말로 현대 로마 年代記(년대기)의 정수다.  I. "콜로나(Colonna)"란 이름과 문장(紋章)은 아주 의심스런 어원적 유래를 가진다. 연설가나 골동품 애호가들이 트라야누스의 기둥이나 헤라클레스의 기둥 혹은 예수가 태형받은 기둥, 또는 사막에서 이스라엘人을 안내한 빛나는 기둥들에 이르기까지 기둥이란 기둥은 간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1104년의 역사적 첫 출현은 그 힘과 전통을 증언하나 이름 자체는 단순한 의미만 설명한다. 카바이(Cavae)의 찬탈에 의해 콜로나家는 파스칼(Paschal) 2세의 군대를 자극했지만 합법적으로 자갈롤라(Zagarola)와 콜로나(Colonna)의 세습영지를 로마의 캄파냐(Campagna) 평원에 보유했고, 후자의 영지의 도시들은 저택과 사원의 유적인 우뚝선 기둥으로 아마 치장되었을 것이다.  이웃 도시 투스쿨룸(Tusculum)의 절반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데서 투스쿨룸 백작들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추정케 하는데 이들은 10세기 使徒座(사도좌)의 폭군들이었다. 그들 자신과 대중적 견해에 따르면, 가장 근원적인 먼 유래는 라인강 어귀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독일의 君主들은 700년의 혁명 동안 때론 재능으로 언제나 부로 증명해온 한 귀족 가문과의 친연성이 가짜든 진짜든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13세기의 끝에, 가장 강력한 지파는 교회존중과 무력면에서 두드러진 6형제와 삼촌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피에트로(Peter)가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개선마차를 타고 카피톨 언덕으로 안내되어 카이사르(Caesar)라는 헛된 구호와 갈채로 환영받았다. 요한(John)과 스테펜(Stephen)이 안코나(Ancona) 후작과 로마냐(Romagna) 백작으로 선언된 것은 니콜라스 4세에 의해서인데 너무나 편향적 후원자인 탓에 풍자적 초상으로 속이 빈 기둥 속에 幽囚된 것처럼 그려졌다.  그의 죽음 후에 그들의 거만한 행동이 인류 중 가장 냉혹한 인간의 불쾌를 사게 되었다. 삼촌과 조카사이인 두명의 추기경은 보니파티우스 8세의 선출을 부인했고 콜로나家는 일시 그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무력에 억제되었다. 그는 그의 개인적 적들에 대항해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영지가 몰수되고 티베레 양안의 요새는 성베드로의 군단과 경쟁 貴族들에게 포위되었다.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혹은 프라에네스테(Praeneste)가 폐허화한 후, 그들의 주 근거지는 땅에 영구적 황무지화의 상징인 쟁기날로 표식되었다.  몰락하고 추방되어 수배된 6형제는 구원과 복수의 희망은 버리지 않은 채 위험한 위장 도피로 유럽을 배회하였다.  그 두 희망의 입장에서 프랑스 궁정이 가장 확실한 피신처였다. 그들은 필립(Philip)의 사업을 촉진하고 지도했다. 그리고 著者는 그들이 幽囚된 폭군의 불운과 용기를 존경하였다면 그들의 관대함을 칭찬하고 싶다. 그들의 民法(민법)은 로마 民衆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콜로나의 영예와 소유가 그들에게 회수되었다. 몇몇 추산을 해 보자면 그들의 富는 그들의 상실에 의해 평가할 수 있고, 그들의 상실은 故人(고인) 된 교황의 조력자들와 상속자들에게 부과된 10만 플로린의 금화의 손실에 의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적 검열과 부적격판정들이 그의 신중한 후계자들에 의해 철회되었고 그 家門의 재산은 일시적 태풍에 의해 더 확고해졌다. 스키아라 콜로나(Sciarra Colonna)의 대담성은 보니파티우스의 幽囚에서 그리고 한참 후 바바리아(Bavaria)의 루이스(Lewis)의 대관에서 두드러진다. 황제의 감사로 그들 紋章  속 기둥은 왕관을 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명성과 재능에서 家門의 으뜸은 老(노) 스테펜인데, 페트라르카(Petrarch)가 그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어 고대 로마 시대 비길 英雄(영웅)으로 존애한 이다. 박해와 추방에서도 그는 民族에게 그의 평화와 전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준다. 고난 중에 그는 동정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다. 다가올 위험은 그의 이름과 조국을 공언케 하였다. "이제 어디에 당신의 요새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가슴에 손을 얻고 "여기"라고 답한 것이다. 같은 덕성으로 후손의 귀환을 지원했다. 쇠퇴하는 그의 시대의 종말까지 스테펜 콜로나의 어른들, 성격, 자식들은 로마 공화국에서와 아비뇽(Avignon) 궁정에서의 그의 고결함에 우쭐댔다.   II.    우르시니家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이주해 왔다. 뛰어난 인물들로 12세기에 그려지는 우르수스(Ursus)의 아들들은 겨우 이 족속의 아버지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혈족의 수, 용감, 원로원과 추기경회의 영예, 셀레스틴 3세와 니콜라스 3세란 그들 혈통의 두 교황의 등극으로 곧 로마 귀족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들의 富가 족벌주의의 초기 남용으로 비난될 수 있다. 성베드로의 영지가 그들의 호의 속에 셀레스틴에 의해 양도되었고 니콜라스는 그들을 위해 군주들의 동맹을 간청하고 롬바르디와 투스카니에 새 왕국을 세우고 로마 원로원  종신의원직을 수여하게 할 야심을 가졌다. 콜로나家의 위대성에 보인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 오래 이어온 싸움에서 대등한 적인 우르시니家의 영광에 도 보인다. 그것이 교회적 국가를 250년간 교란시켰다. 월등함과 권력에 대한 질투심은 그들 싸움의 진짜 배경이었지만, 훌륭함의 허울적 표식으로 콜로나家는 기벨린(Ghibelines)이란 이름과 帝國(제국)의 黨(당)을 품었고 우르시니家는 겔프(Guelphs)란 칭호와 교회의 대의를 옹호했다.  독수리와 열쇠들이 적대자의 기치에 나부꼈고, 그 싸움의 유래가 잊혀진지 오래가 되어도  伊太利의 두 당파는 서로 거세게 부딪혔다.  교황이 아니뇽으로 물러간 후에, 임자 없는 공화국을 무력으로 다투었고 매해 경쟁자로 원로원 의원 두 명을 뽑는 너절한 합의로 불화의 오류가 영속화되었다. 그들의 사적 적대에 의해 도시와 모국이 황폐화되고 흔들리는 균형 속에 성공은 수시로 교대되었었다. 그러나, 우르시니 家의 가장 명성있는 대장이 少(소) 스테펜 콜로나에 의해 기습 살해되기까지는 어느 쪽 家門도 칼날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개선은 휴전을 파괴했다는 비난으로 얼룩졌다. 그들의 패배는 교회 문앞 순진무구한 아이와 두명의 조력자들의 암살로 되갚아졌다. 승리한 콜로나는 한 단년 임기의 동료 의원과 함께 5년 기간 동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언되었다.페트라르카의 詩想(시상)이 이 관대한 젊은이 그의 영웅의 아들이 로마와 伊太利에 본래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그의 정의가 대리석 기둥의 영원한 지주를 전복하려한는 영원한 늑대와 사자, 뱀과 곰들을 박멸할  한 소망, 한 희망, 한 예언을 고무시켰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제69장



전체적으로 기번의 로마사는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로마사 나아가서는 유럽사를 개관하는 구도다. 다만, 마지막에 다시 그는 동서로마의 기원이 되는 도시 로마의 역사로 되돌아와 복잡한 심경으로 기나긴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교황 자신이 주권자가 되고 로마에서 나중에는 실질적으로는 호족들이 그 주권을 찬탈하고 교황을 꼭둑각시로 만들었다는 이 당시 교황령의 역사지만, "호족들의 역사를 모두 기술하려는 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기번의 말처럼 소략해서 기번의 말만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한다. 대표적으로 콜로나가문와 그들의 맞수 우르시니가문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 아비뇽 유수가 시작되던 시기의 보니파티우스 8세와  공정왕 필립과 콜로나 가문의 얽히고 섥힌 관계들을 소개된다. 콜로나 가문의 상징이 "기둥(column)"이 되었다는 가벼운 웃음이 나올 만한 일에 시성 페트라르카 마저 진지하게 송시를 바쳤다는 데서는 쓴웃음 짓게 한다. 문득 콜로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 하는 엉뚱한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최근 김광석 부녀타살의혹에 즈음 이명박정부하 3大미스테리事件





과거 이명박 정권하 3대미스테리 사건으로 타블로, 오원춘과 더불어 "안재환" 사건을 들었는데 이 중에서 안재환 사건은 오래전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확실하다고 썼었다.



확실히 김광석 건도 미스테리임에 틀림없다. 정황으로 보면 영락없이 타살이나 정작 시신에선 타살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간에 안재환을 두고 장기매매살인이라 하였는데 그가 유명인인 점을 생각하면 역시 수사기관의 부검결과는 조작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추가적인 의혹은 역시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재환 사건의 경우 그 여파로 일어난 인터넷활동이 결국 최진실이란 또 한명의 유명인을 자살로 몰고 갔다. 마친 그것을 명분으로 인터넷실명제가 강화된 것으로 기억하고 명분을 얻었다. 이 때는 이명박 집권초다. (입법은 한 해전 노무현 정권 말로 안다.) 그리고 이명박정부는 국정원 등을 동원해 인터넷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최진실에 대한 악성소문 중 찌라시와 청와대가 쏘스란 이야기도 들렸다. 대체로 찌라시는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 등을 쏘스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이명박 시대 연예인자살률이 비상히 높았던 것도 나는 의심스럽다. 이 모든 것이 의혹일까? 혹 어떤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한 음모일까?

이런 점 때문에라도 자살이라도 의혹은 의혹대로 풀어내야 한다. 김광석 안재환 루머의 악성인 면은 바로 가족간에도 불신을 심어놓는다는 그러한 점 때문에 더하다. 한마디로, 김광석 사건이든 안재환 사건이든 자살이더라도, 그것이 다는 아닌 그런 사건이다.   

대문







"간단히 말해, 한 폴리스로서 우리는 헬라스의 학교 같은 곳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우리 아테네인들을 뺀다면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그렇게 수많은 위기를 돌파하고 다방면에서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을 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황이 필요로 하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란 것을 이 나라의 힘이 입증한 바입니다. 동시대인 중 아테네만 명성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힘을 확립했고, 또 우리만이 패배를 안겨준 적에 복수하려는 공격자들에게 기회를 주거나 우리의 보호국들이 우리의 지배하는 능력을 의심할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래 모든 시간들의 존경이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의 이러한 힘에 대해 증인을 남겨두었으며 뿐만 아니라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송시작가들이나 사실 앞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질 인상만으로 사람들을 혹할 글을 쓰는 자들에게 호메로스가 필요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바다와 육지에 우리의 고귀한 길을 놓고 악이든 선이든 불멸의 기념비를 우리 앞에 세워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조국을 위해 단호하게 그리고 고귀하게 싸우다 죽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살아남은 자들 모두 역시 조국을 위해 고난을 견딜 준비가 된 아테네입니다."

- 페리클레스의 연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전쟁사, 2.41>               




1. 두번째 대문입니다. (업데이트 2016.01.13)

2. 이 블로그는 로마사 등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 글들은 틈틈히 몸젠 <로마사>의 제3권을 번역해 올렸고 "로마제국쇠망사"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그 밖에 고대사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잡다한 글들이 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며, 글이 부족함이 많아 실망스러우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3. 블로그운영원칙은 첫대문과 같습니다. 이글루스는 지금은 과거만 못한 면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점잖은 척하면서 굉장히 조직적 계획적 악의적으로 자신(들)과 어긋나는 사람을 공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가미가제식 트롤전술이나 악플인해전술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처음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때 베푼 무제한 관용 대신, 본블로그에 작성된 댓글 트랙백 막론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이 언제 작성되었건 가리지 않고 삭제됩니다. 특히 방문자 상호간 싸움 자제해 주세요. 대체로 본 블로그나 주인장을 공격하려면서 논리적인 반박이 아닌 잘못되고 삐딱한 시도를 하는 글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만 아니면 본블로그를 찾는 그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이런 불미스런 일들은 요즘 본 블로그나 이글루스 자체가 저조한 편이어서 줄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개인사정으로 인해 조만간 비로그인 덧글 금지할 수도 있습니다.)

4. 티스토리에 만든 두번째 블로그입니다. http://goodadmiral.tistory.com/ 

 되도록 같은 내용으로 올리지 않으려 합니다. 잡다한 번역을 주로 올립니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인상적인 단락과 <수에토니우스 네로전>이나 <몸젠 로마사>의 다른 부분들입니다. <로마제국쇠망사>도 수정보완하려는데 완성을 기약하고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아무튼 방문 수가 저조한 편이니 자주 찾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는 부모자식도 없는 냉혈동물 갑 동양사



서양도 다르지 않겠지만 동양의 군주들 사이의 일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편이다. 특히 바로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부자간 다툼은 거의 정형화된 권력 게임의 법칙으로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가 죽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권력을 지치기 위해 친아들을 굶어죽인 처사를 어찌받아들여야 할까만은 영조의 경우는 이미 그가 원인이 있다지만 사도세자의 상태가 이미 극단적 조치를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경우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네 못난 조선의 군주들의 경우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분히 그것을 공격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식이나 부모를 희생시켰다는 소극성과 방어성이 있어 한편으로 동정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역대 피도 눈물도 없는 부모 군주 갑은 역시 중국사 전무후무의 여제 무후일 것 같다.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해 멀쩡한 자기 자식을 교살해 버린 것인데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지? 자기가 죽인 자식을 놓고 악어의 눈물을 뚝뚝떨어뜨리며 경쟁자들의 짓으로 몰아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하기야 근자 우리나라에 있었던 괴사건 중에 특히 여성싸이코 패스들의 활약이 대개 이 계통이어서, 자식은 물론 주변에 만만한 가족을 희생시켜 보험금을 타내는 것은 많이 알려졌다. 그런면에서 권력의 단물을 위해 만만한 가족을 희생시켰던 측천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웃기면서도 주목되는 것 하나는 이런 사이코패스형 인물이 제왕의 자리에 앉았다 해서 군주랍시고 재평가니 무어니 하며 지도자로서 평가한다는 것이 그렇다. 다만 힘없는 여자니까 연약한 여성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그 또한 이해해 주자? 이렇게 마음먹으면 적게나마 이해가 되려나.

두번째는 이런 류의 인물에게 고조선이래 한국사의 정통성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실망감이 그것이다. 하기야 연개소문 자체도 시군의 죄를 범한 인물이고 보면 측천 같은 인물을 맞수로 삼다가 드디어 나라를 그녀에게 망하게 한 것도 어찌 보면 인과응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나 망하게 한 당녀는 망함을 당할 연개소문이나 그 못난 자식들에게는 더 없는 맞수다. 물론 고구려는 군주라도 폭군을 시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래되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의 경우는 그런 흠있는 군주는 아니었으므로 변명되기가 쉽지 않다.



대공개! 박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세팅한 화장대 박근혜 기인 혹은 극기녀



말로만 듣던 연예인이나 쓸 물건이라는 화장대가 공개되었다.
 




결국 조폭과 이명박이 대한민국 실세란 말? 이명박정부하 3大미스테리事件


이번 <그것이 알고 싶다> 박근혜 친척 살인사건 편을 보니 우선 사건 당시가 이명박 통치하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이 지켜보는 중에 단순히 조폭들과 경찰 몇 명 포섭해서 유력 대통령후보 친척이 관계되고 후보 조차 관련된 정황이 있는 사건이 그냥 넘어갈리가 있을까.

이게 이명박 스타일이란 게 이명박 시기에 유행했던 일련의 괴사건 중 하나랑 비슷하다. 전주예식장 사장 살인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명박 시기에 난 사건인데  의혹은 눈덩이 같은데 경찰은 말같지 않은 시나리오 이상으로 조사하지 않는 것인데 박근혜 정부에서도 비슷하게 결론이 났다.

상식적으로 이게 박근혜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명박이가 몰랐을리가 없다. 아니 얘기를 따라가 보면 살인을 청부받은 조폭 중에 살아있는 놈이 사실상 박근혜 정부 실세라는 요상한 결론이 나온다. 박근혜를 한방에 보낼 약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나 다른 야당인사 비리라면 눈을 부릅뜨던 이명박 정권에서도 몰랐을리가 없다.

허술하지만 하나의 살인미수로 발단이 되어 눈덩이처럼 커지는 과정은 어떤 목적과 계획하에 준비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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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