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콜로나 가문과 우르시니 가문 인문

제11세기 초두, 伊太利(이태리)는 君主(군주)에게나 民衆(민중)에게나 한결같이 억압적인 봉건적 暴政(폭정)에 노출되었다. 人間(인간) 본연의 권리들은 수많은 共和國(공화국)들에 의해 옹호되었고 곧 그들이 자기들 자유와 지배를 도시로부터 인접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貴族(귀족)들의 劍(검)은 부러졌고, 그 奴隸(노예)들은 解放(해방)되었으며, 그들의 城郭(성곽)은 헐리고, 이제 사교와 복종의 습관을 들였고, 자신들의 야망을 자치체의 영예직에 한정시켰으며, 베니스와 제노아의 자부심 강한 貴族政治(귀족정치) 상에서도 각 파트리키아누스 家門(가문)이 법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질서한 로마의 政府(정부)는 내부의 반란적 후예들을 요리할 일을 감당치 못해, 반도들이 성벽 안팍에서 政務官(정무관)들의 권위를 비웃었다. 이는 政權(정권)을 위한 貴族과 平民(평민)간 싸움은 더이상 아니었다.  豪族(호족)들이 무장하며 獨立(독립)을 선언했고, 그들의 宮殿(궁전)과 城砦가 포위에 대비 강화되고 이들의 사적인 싸움이 수많은 封臣(봉신)과 從士(종사)들에게 맡겨졌다. 출신과 정서 상으로 그들은 그 지역에서 외지인이였고 진짜 로마인이라면 市民(시민)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자칭 로마의 君主로 칭하는 이런 오만한 이방인들을 외면하였을 것이었다. 일련의 검은 革命(혁명)들이 지난 후 族譜(족보)란 것들은 죄다 망실되었고, 家門의 이름들은 없어지고, 血族(혈족)의 혈통 수천 갈래가 한데 뒤섞였다. 고트族(족)과 롬바르드族, 희랍族과 프랑크族, 게르만族과 노르만族이  王家(왕가)의 恩賜(은사)나 勇猛(용맹)이라는 特權(특권)을 통해 가장 좋은 소유권을 얻어갔다.  이런 예들이 추정될 만한 것들은 널렸지만, 히브리人(인)이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 직위까지 올라선 것이 이들 비참한 유랑 망국민들의 긴 幽囚(유수) 속에서는 비길 데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레오 9세 시대에 한 부유하고 학식있는 猶太人(유태인)이 基督敎(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의 代父(대부)인 당시 敎皇(교황)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레오의 아들 피에트로(Peter)의 열정과 용기가 그레고리 7세의 대의에 두드러지며, 교황은 이러한 그의 충직한 지지자에게 하드리아누스의 靈廟(영묘)와 크레스켄티우스의 塔(탑) 즉 소위 산탄젤로城(성)의 통치를 위임했다.  父子(부자) 양쪽이 무수한 자손을 가졌다. 고리대의 수익인 그들의 富(부)는 도시의 최고 귀족가문에게 배분된 채 광범위한 동맹자들을 끌어들여, 이 改宗者(개종자)의 손자는 성베드로의 玉座(옥좌)에 오르는데 조상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다수의 성직자와 민중이 그를 지지했다. 바티칸에서 수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아나클레투스(Anacletus)에 對立敎皇(대립교황)이란 칭호가 붙이게 된 것은 겨우 성베르나르(St. Bernard)의 언변과 이노켄티우스 2세의 최후의 개선에 의해서 일 뿐이었다.  그의 패배와 죽음 이후로는, 레오의 후손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 현재 야심만만한 貴族 중에 猶太 혈통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에 몰락하거나 현재까지 변형된 영화를 이어가는 가문들을 거명하는 것이 著者(저자)의 계획은 아니다.  프란지파니家의 오랜 집정관 가계는 기근시대에 빵을 쪼개 나누어 먹은 인심 속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고 이런 자선은 그들의 동맹이었던 코르시(Corsi)家와 함께 요새들로 둘러 싼 도시 내 넉넉한 공간에 문을 걸어잠근 것 이상의 진정한 영광이다. 사비니族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벨리(Savelli)家는 옛 존엄을 유지해 오고 있고, 카피주치(Capizucchi)家의 낡은 칭호는 첫 원로원 의원들의 동전에 새겨졌다. 콘티(Conti)家는 시그니아(Signia)의 백작들의 영지 없는 영예를 보유하고 안니발디(Annibaldi)家는 카르타고 영웅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아주 무지하거나 아주 평범해졌을 것이다. 

도시의 동료나 군주들 중에 콜로나(COLONNA)와 우르시니(URSINI) 家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들의 가문의 이야기야 말로 현대 로마 年代記(년대기)의 정수다.  I. "콜로나(Colonna)"란 이름과 문장(紋章)은 아주 의심스런 어원적 유래를 가진다. 연설가나 골동품 애호가들이 트라야누스의 기둥이나 헤라클레스의 기둥 혹은 예수가 태형받은 기둥, 또는 사막에서 이스라엘人을 안내한 빛나는 기둥들에 이르기까지 기둥이란 기둥은 간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1104년의 역사적 첫 출현은 그 힘과 전통을 증언하나 이름 자체는 단순한 의미만 설명한다. 카바이(Cavae)의 찬탈에 의해 콜로나家는 파스칼(Paschal) 2세의 군대를 자극했지만 합법적으로 자갈롤라(Zagarola)와 콜로나(Colonna)의 세습영지를 로마의 캄파냐(Campagna) 평원에 보유했고, 후자의 영지의 도시들은 저택과 사원의 유적인 우뚝선 기둥으로 아마 치장되었을 것이다.  이웃 도시 투스쿨룸(Tusculum)의 절반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데서 투스쿨룸 백작들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추정케 하는데 이들은 10세기 使徒座(사도좌)의 폭군들이었다. 그들 자신과 대중적 견해에 따르면, 가장 근원적인 먼 유래는 라인강 어귀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독일의 君主들은 700년의 혁명 동안 때론 재능으로 언제나 부로 증명해온 한 귀족 가문과의 친연성이 가짜든 진짜든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13세기의 끝에, 가장 강력한 지파는 교회존중과 무력면에서 두드러진 6형제와 삼촌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피에트로(Peter)가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개선마차를 타고 카피톨 언덕으로 안내되어 카이사르(Caesar)라는 헛된 구호와 갈채로 환영받았다. 요한(John)과 스테펜(Stephen)이 안코나(Ancona) 후작과 로마냐(Romagna) 백작으로 선언된 것은 니콜라스 4세에 의해서인데 너무나 편향적 후원자인 탓에 풍자적 초상으로 속이 빈 기둥 속에 幽囚된 것처럼 그려졌다.  그의 죽음 후에 그들의 거만한 행동이 인류 중 가장 냉혹한 인간의 불쾌를 사게 되었다. 삼촌과 조카사이인 두명의 추기경은 보니파티우스 8세의 선출을 부인했고 콜로나家는 일시 그의 현세적이고 영적인 무력에 억제되었다. 그는 그의 개인적 적들에 대항해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영지가 몰수되고 티베레 양안의 요새는 성베드로의 군단과 경쟁 貴族들에게 포위되었다.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혹은 프라에네스테(Praeneste)가 폐허화한 후, 그들의 주 근거지는 땅에 영구적 황무지화의 상징인 쟁기날로 표식되었다.  몰락하고 추방되어 수배된 6형제는 구원과 복수의 희망은 버리지 않은 채 위험한 위장 도피로 유럽을 배회하였다.  그 두 희망의 입장에서 프랑스 궁정이 가장 확실한 피신처였다. 그들은 필립(Philip)의 사업을 촉진하고 지도했다. 그리고 著者는 그들이 幽囚된 폭군의 불운과 용기를 존경하였다면 그들의 관대함을 칭찬하고 싶다. 그들의 民法(민법)은 로마 民衆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콜로나의 영예와 소유가 그들에게 회수되었다. 몇몇 추산을 해 보자면 그들의 富는 그들의 상실에 의해 평가할 수 있고, 그들의 상실은 故人(고인) 된 교황의 조력자들와 상속자들에게 부과된 10만 플로린의 금화의 손실에 의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적 검열과 부적격판정들이 그의 신중한 후계자들에 의해 철회되었고 그 家門의 재산은 일시적 태풍에 의해 더 확고해졌다. 스키아라 콜로나(Sciarra Colonna)의 대담성은 보니파티우스의 幽囚에서 그리고 한참 후 바바리아(Bavaria)의 루이스(Lewis)의 대관에서 두드러진다. 황제의 감사로 그들 紋章  속 기둥은 왕관을 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명성과 재능에서 家門의 으뜸은 老(노) 스테펜인데, 페트라르카(Petrarch)가 그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어 고대 로마 시대 비길 英雄(영웅)으로 존애한 이다. 박해와 추방에서도 그는 民族에게 그의 평화와 전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준다. 고난 중에 그는 동정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다. 다가올 위험은 그의 이름과 조국을 공언케 하였다. "이제 어디에 당신의 요새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가슴에 손을 얻고 "여기"라고 답한 것이다. 같은 덕성으로 후손의 귀환을 지원했다. 쇠퇴하는 그의 시대의 종말까지 스테펜 콜로나의 어른들, 성격, 자식들은 로마 공화국에서와 아비뇽(Avignon) 궁정에서의 그의 고결함에 우쭐댔다.   II.    우르시니家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이주해 왔다. 뛰어난 인물들로 12세기에 그려지는 우르수스(Ursus)의 아들들은 겨우 이 족속의 아버지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혈족의 수, 용감, 원로원과 추기경회의 영예, 셀레스틴 3세와 니콜라스 3세란 그들 혈통의 두 교황의 등극으로 곧 로마 귀족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들의 富가 족벌주의의 초기 남용으로 비난될 수 있다. 성베드로의 영지가 그들의 호의 속에 셀레스틴에 의해 양도되었고 니콜라스는 그들을 위해 군주들의 동맹을 간청하고 롬바르디와 투스카니에 새 왕국을 세우고 로마 원로원  종신의원직을 수여하게 할 야심을 가졌다. 콜로나家의 위대성에 보인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대를 이어 오래 이어온 싸움에서 대등한 적인 우르시니家의 영광에 도 보인다. 그것이 교회적 국가를 250년간 교란시켰다. 월등함과 권력에 대한 질투심은 그들 싸움의 진짜 배경이었지만, 훌륭함의 허울적 표식으로 콜로나家는 기벨린(Ghibelines)이란 이름과 帝國(제국)의 黨(당)을 품었고 우르시니家는 겔프(Guelphs)란 칭호와 교회의 대의를 옹호했다.  독수리와 열쇠들이 적대자의 기치에 나부꼈고, 그 싸움의 유래가 잊혀진지 오래가 되어도  伊太利의 두 당파는 서로 거세게 부딪혔다.  교황이 아니뇽으로 물러간 후에, 임자 없는 공화국을 무력으로 다투었고 매해 경쟁자로 원로원 의원 두 명을 뽑는 너절한 합의로 불화의 오류가 영속화되었다. 그들의 사적 적대에 의해 도시와 모국이 황폐화되고 흔들리는 균형 속에 성공은 수시로 교대되었었다. 그러나, 우르시니 家의 가장 명성있는 대장이 少(소) 스테펜 콜로나에 의해 기습 살해되기까지는 어느 쪽 家門도 칼날에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개선은 휴전을 파괴했다는 비난으로 얼룩졌다. 그들의 패배는 교회 문앞 순진무구한 아이와 두명의 조력자들의 암살로 되갚아졌다. 승리한 콜로나는 한 단년 임기의 동료 의원과 함께 5년 기간 동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선언되었다.페트라르카의 詩想(시상)이 이 관대한 젊은이 그의 영웅의 아들이 로마와 伊太利에 본래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그의 정의가 대리석 기둥의 영원한 지주를 전복하려한는 영원한 늑대와 사자, 뱀과 곰들을 박멸할  한 소망, 한 희망, 한 예언을 고무시켰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제69장



전체적으로 기번의 로마사는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로마사 나아가서는 유럽사를 개관하는 구도다. 다만, 마지막에 다시 그는 동서로마의 기원이 되는 도시 로마의 역사로 되돌아와 복잡한 심경으로 기나긴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교황 자신이 주권자가 되고 로마에서 나중에는 실질적으로는 호족들이 그 주권을 찬탈하고 교황을 꼭둑각시로 만들었다는 이 당시 교황령의 역사지만, "호족들의 역사를 모두 기술하려는 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기번의 말처럼 소략해서 기번의 말만으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이 아닐까 한다. 대표적으로 콜로나가문와 그들의 맞수 우르시니가문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 아비뇽 유수가 시작되던 시기의 보니파티우스 8세와  공정왕 필립과 콜로나 가문의 얽히고 섥힌 관계들을 소개된다. 콜로나 가문의 상징이 "기둥(column)"이 되었다는 가벼운 웃음이 나올 만한 일에 시성 페트라르카 마저 진지하게 송시를 바쳤다는 데서는 쓴웃음 짓게 한다. 문득 콜로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 하는 엉뚱한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최근 김광석 부녀타살의혹에 즈음 이명박정부하 3大미스테리事件





과거 이명박 정권하 3대미스테리 사건으로 타블로, 오원춘과 더불어 "안재환" 사건을 들었는데 이 중에서 안재환 사건은 오래전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확실하다고 썼었다.



확실히 김광석 건도 미스테리임에 틀림없다. 정황으로 보면 영락없이 타살이나 정작 시신에선 타살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간에 안재환을 두고 장기매매살인이라 하였는데 그가 유명인인 점을 생각하면 역시 수사기관의 부검결과는 조작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추가적인 의혹은 역시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재환 사건의 경우 그 여파로 일어난 인터넷활동이 결국 최진실이란 또 한명의 유명인을 자살로 몰고 갔다. 마친 그것을 명분으로 인터넷실명제가 강화된 것으로 기억하고 명분을 얻었다. 이 때는 이명박 집권초다. (입법은 한 해전 노무현 정권 말로 안다.) 그리고 이명박정부는 국정원 등을 동원해 인터넷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최진실에 대한 악성소문 중 찌라시와 청와대가 쏘스란 이야기도 들렸다. 대체로 찌라시는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 등을 쏘스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이명박 시대 연예인자살률이 비상히 높았던 것도 나는 의심스럽다. 이 모든 것이 의혹일까? 혹 어떤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한 음모일까?

이런 점 때문에라도 자살이라도 의혹은 의혹대로 풀어내야 한다. 김광석 안재환 루머의 악성인 면은 바로 가족간에도 불신을 심어놓는다는 그러한 점 때문에 더하다. 한마디로, 김광석 사건이든 안재환 사건이든 자살이더라도, 그것이 다는 아닌 그런 사건이다.   

대문







"간단히 말해, 한 폴리스로서 우리는 헬라스의 학교 같은 곳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우리 아테네인들을 뺀다면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그렇게 수많은 위기를 돌파하고 다방면에서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을 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황이 필요로 하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란 것을 이 나라의 힘이 입증한 바입니다. 동시대인 중 아테네만 명성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힘을 확립했고, 또 우리만이 패배를 안겨준 적에 복수하려는 공격자들에게 기회를 주거나 우리의 보호국들이 우리의 지배하는 능력을 의심할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래 모든 시간들의 존경이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의 이러한 힘에 대해 증인을 남겨두었으며 뿐만 아니라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송시작가들이나 사실 앞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질 인상만으로 사람들을 혹할 글을 쓰는 자들에게 호메로스가 필요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바다와 육지에 우리의 고귀한 길을 놓고 악이든 선이든 불멸의 기념비를 우리 앞에 세워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조국을 위해 단호하게 그리고 고귀하게 싸우다 죽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살아남은 자들 모두 역시 조국을 위해 고난을 견딜 준비가 된 아테네입니다."

- 페리클레스의 연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전쟁사, 2.41>               




1. 두번째 대문입니다. (업데이트 2016.01.13)

2. 이 블로그는 로마사 등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 글들은 틈틈히 몸젠 <로마사>의 제3권을 번역해 올렸고 "로마제국쇠망사"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그 밖에 고대사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잡다한 글들이 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며, 글이 부족함이 많아 실망스러우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3. 블로그운영원칙은 첫대문과 같습니다. 이글루스는 지금은 과거만 못한 면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점잖은 척하면서 굉장히 조직적 계획적 악의적으로 자신(들)과 어긋나는 사람을 공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가미가제식 트롤전술이나 악플인해전술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처음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때 베푼 무제한 관용 대신, 본블로그에 작성된 댓글 트랙백 막론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이 언제 작성되었건 가리지 않고 삭제됩니다. 특히 방문자 상호간 싸움 자제해 주세요. 대체로 본 블로그나 주인장을 공격하려면서 논리적인 반박이 아닌 잘못되고 삐딱한 시도를 하는 글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만 아니면 본블로그를 찾는 그 누구라도 환영입니다.

(이런 불미스런 일들은 요즘 본 블로그나 이글루스 자체가 저조한 편이어서 줄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개인사정으로 인해 조만간 비로그인 덧글 금지할 수도 있습니다.)

4. 티스토리에 만든 두번째 블로그입니다. http://goodadmiral.tistory.com/ 

 되도록 같은 내용으로 올리지 않으려 합니다. 잡다한 번역을 주로 올립니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인상적인 단락과 <수에토니우스 네로전>이나 <몸젠 로마사>의 다른 부분들입니다. <로마제국쇠망사>도 수정보완하려는데 완성을 기약하고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아무튼 방문 수가 저조한 편이니 자주 찾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는 부모자식도 없는 냉혈동물 갑 동양사



서양도 다르지 않겠지만 동양의 군주들 사이의 일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편이다. 특히 바로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부자간 다툼은 거의 정형화된 권력 게임의 법칙으로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사도세자가 죽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권력을 지치기 위해 친아들을 굶어죽인 처사를 어찌받아들여야 할까만은 영조의 경우는 이미 그가 원인이 있다지만 사도세자의 상태가 이미 극단적 조치를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경우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네 못난 조선의 군주들의 경우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다분히 그것을 공격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식이나 부모를 희생시켰다는 소극성과 방어성이 있어 한편으로 동정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역대 피도 눈물도 없는 부모 군주 갑은 역시 중국사 전무후무의 여제 무후일 것 같다.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해 멀쩡한 자기 자식을 교살해 버린 것인데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지? 자기가 죽인 자식을 놓고 악어의 눈물을 뚝뚝떨어뜨리며 경쟁자들의 짓으로 몰아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하기야 근자 우리나라에 있었던 괴사건 중에 특히 여성싸이코 패스들의 활약이 대개 이 계통이어서, 자식은 물론 주변에 만만한 가족을 희생시켜 보험금을 타내는 것은 많이 알려졌다. 그런면에서 권력의 단물을 위해 만만한 가족을 희생시켰던 측천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웃기면서도 주목되는 것 하나는 이런 사이코패스형 인물이 제왕의 자리에 앉았다 해서 군주랍시고 재평가니 무어니 하며 지도자로서 평가한다는 것이 그렇다. 다만 힘없는 여자니까 연약한 여성이나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그 또한 이해해 주자? 이렇게 마음먹으면 적게나마 이해가 되려나.

두번째는 이런 류의 인물에게 고조선이래 한국사의 정통성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실망감이 그것이다. 하기야 연개소문 자체도 시군의 죄를 범한 인물이고 보면 측천 같은 인물을 맞수로 삼다가 드디어 나라를 그녀에게 망하게 한 것도 어찌 보면 인과응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나 망하게 한 당녀는 망함을 당할 연개소문이나 그 못난 자식들에게는 더 없는 맞수다. 물론 고구려는 군주라도 폭군을 시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래되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의 경우는 그런 흠있는 군주는 아니었으므로 변명되기가 쉽지 않다.



대공개! 박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세팅한 화장대 박근혜 기인 혹은 극기녀



말로만 듣던 연예인이나 쓸 물건이라는 화장대가 공개되었다.
 




결국 조폭과 이명박이 대한민국 실세란 말? 이명박정부하 3大미스테리事件


이번 <그것이 알고 싶다> 박근혜 친척 살인사건 편을 보니 우선 사건 당시가 이명박 통치하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이 지켜보는 중에 단순히 조폭들과 경찰 몇 명 포섭해서 유력 대통령후보 친척이 관계되고 후보 조차 관련된 정황이 있는 사건이 그냥 넘어갈리가 있을까.

이게 이명박 스타일이란 게 이명박 시기에 유행했던 일련의 괴사건 중 하나랑 비슷하다. 전주예식장 사장 살인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명박 시기에 난 사건인데  의혹은 눈덩이 같은데 경찰은 말같지 않은 시나리오 이상으로 조사하지 않는 것인데 박근혜 정부에서도 비슷하게 결론이 났다.

상식적으로 이게 박근혜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명박이가 몰랐을리가 없다. 아니 얘기를 따라가 보면 살인을 청부받은 조폭 중에 살아있는 놈이 사실상 박근혜 정부 실세라는 요상한 결론이 나온다. 박근혜를 한방에 보낼 약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나 다른 야당인사 비리라면 눈을 부릅뜨던 이명박 정권에서도 몰랐을리가 없다.

허술하지만 하나의 살인미수로 발단이 되어 눈덩이처럼 커지는 과정은 어떤 목적과 계획하에 준비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고 ........


박근혜, 극기와 집착 사이 박근혜 기인 혹은 극기녀


가방끈에 대한 저 비범한 집착. 저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저리 묵직한 가방을 끝그네 놓지 않을 힘이 나올까.
흡사 부친의 권력을 거머쥐려는 악력을 연상케 한다. 박 부녀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한류스타 뱜칠 연예인 패션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이슬람 패션까지도 상황에 따라 아우를 수 있는 허영의 끝판여왕. 도대체 일국의 국가원수로서 저런 연예인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세계정상들을 만날 멘탈의 저력은 무엇일까.


이건 앞과는 전혀 반대되는 당선인 시절 서민코스프레 하며 독거노인 방문하던 때인데 극단적으로 저 불편한 무릎꿇기 자세로 뭐에 취한 듯 별다른 고통 없이 한참 떠들수 있는 저 의지력! 옆에 사람들 표정과 대비되는,,,,,,,, 같이 무릎꿇은 아줌마 표정이 않좋고 편한 자세로 않은 어르신들도 그닥........


결론적으로 박에게는 가방이나 패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차도르건 서민패션이건 한마디로 다 소화할 수 있다 이건 것 같다. 최태민의 주술에 걸린 상태기에 그들이 시키는 것이라면 뭐 든 할 수 있고 가방의 무게도 무플 꿇이의 통증도 전혀 못느끼는 것이 바로 이인 박근혜라는 것을.




더럽다고 남의 집 변기도 멋대로 뜯는 멘탈 박근혜 기인 혹은 극기녀


타블로 사건 늘 궁금했던 것 이명박정부하 3大미스테리事件


이 말할 때마다 블로그 링크가 하나씩 줄 만큼 본 블로그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타블로 사건에서 유심히 보았던 것은 타블로와 그의 가족들에게 수상한 점들이 넘쳐났지만 대학측 인증 한방에 모든 것이 덮였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늘 수상했던 것 중에 하나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서울공대 학력의혹이었다는 것이다. 서울공대 졸업사진 중의 진짜 '이광부' 씨가 따로 있다는 것이 타진요 측의 주장이던가. 사진은 꽤 닮은 것은 별도로 서울대 출신이 아무리 그 당시 공대가 별 볼일 없어도 어찌 고졸이 될까말까한 학력의 미용사와 결혼을 하고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질 수 있냐 이런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가족관계에도 그 외에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한 가지 내가 지금까지 내놓고 말하지 않았더 것 중에 하나가 그 이광부 씨가 고아라는 것이었다. 전쟁 고아. 그 때 생각으로 그의 결혼이나 직업도 수상했지만 고아 출신이 과연 어떤 든든한 후원자를 만났길래 그 시절 공부에만 매진하여 서울대에 갈 수 있었을가 의심이 갔다.

근데 최근 박노자의 말에 역시 고아출신 실업가 모씨를 CIA요원으로 거의 확정지은 글을 보았다. 여전히 그 정도의 일을 한 사람을 스파이라 하기엔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지만 아무래도 공인의 말이 있으니 가능성이 높아져 보인다. 아무래도 이광수 씨의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은 학력의 배후에는 역시 타블로의 부친 역시 실력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보다는 후원자로 정보계통의 뭔가로 두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블로 의혹과는 별도로 그러니까 이광수 씨 학력의혹을 남긴 이유는 그가 일종의 정보부 장학생으로 '특례 입학(?)'한 탓이 아닐까 내내 그 생각을 했었다.


타블로 의혹에서 더 본질적일 수 있는 것은 학력 진위와 별도로 이명박과 이광부 씨가 소망교회 인맥으로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또한 타블로 소문 중에 이명박의 아들과 타블로가 같은 브로커를 써서 가짜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경찰 담당자도 소망교회 인맥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아니 땐 굴둑에 연기가 나겠는가.

타진요 싫어하는 이들의 주장 중에는 '아니 왜 도대체 일개 연예인의 학력에 그렇게 목을 매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옳은 말이다. 타진요들의 진실찾기(?)는 그냥 아마추어 수준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학의 홈페이지에서 졸업기준과 타블로가 공개한 성적표의 학점취득 과목들 까지 하나하나 대조해서 따지고 들어가는데 원 세상에 연예인 한명의 학력 위조에 거의 첩보전이나 베테랑 기자들이나 할 정도의 집요한 조사를 하나 누구나 의아했을 것인데 사실 이게 내 생각엔 거의 이명박과 반이명박 세력의 정치투쟁의 일부였고 실제로 재판은 질질 끌다가 결국은 그의 임기 내에 결정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타진요들을 처벌받지 않은 채로 남긴 채 말이다. 타블로 사건은 사실상 도저히 이명박과 그 정치적 반대세력이 벌인 숭학한 정치투쟁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한 평범한 연예인 학력 진위 여부의 문제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 규모였다. 티진요 조사관(?) 들은 자발적으로 모였다기엔 너무나 프로급이었다. 꼭 이명박이 관련되었다고 하기엔 증거가 부족하지만 그렇지만 타블로 사건은 보통이상의 권력투쟁이나 다투려는 이익이 있는 파워게임의 일부로 보지 않기에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면이 많다. 이것이 타블로 사건에 대해 내가 마지막 첨언할 부분이다.

※ 본인은 이명박에 대한 학력의혹도 갖는다. 사실 이명박과 이광수는 친구라는 소문도 있고 자세히 보면 비슷한 배경을 가졌다. 이명박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半고아라고 하더라. 친부는 맞는데 친모 쪽이 아니더라 카는 소문이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 형에 비해 사실상 버려진 아이였던 것만은 자기 증언으로도 확인이 되는 것이다. 이명박에게도 부정입학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의 교양머리가 아무리 그 당시 고대가 별볼일 없었더라도 그 시절 대학생으로는 턱없이 부족함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해서 나는 이명박 또한 '정보부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으나 물론 증거는 없다. 다만 고아 혹은 半고아 상태에서 그 당시 대학에 가는 것 조차 어려웠을 거라는 것고 그의 反지성적 습성에서 필을 받았다는 것이랄까. 또한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고.





아틸라의 죽음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76 로마제국쇠망사


훈족이 서로마를 침공할 무렵 아틸라는 로마제국으로 부터 들어오는 수입에 궁해 있었다. 동로마제국은 한마디로 서로마제국만큼 약화된 상태는 아니어서 똑같은 말썽꾼임에도 반달족이 심지어 로마로 부터 부마국으로 삼을 정도의 동맹 대접을 상황에 따라 받을 수 있었던 데 비해 동로마에서는 전혀 훈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도 동로마로부터 돈을 챙기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족을 더욱 압박했던 것은 비교적 훈족문제에 유하다는 평을 들었던 테오도시오스 2세 황제가 사망하고 계승한 신황제가 좀더 단호한 의지를 밝힌데서 비롯되었다. 섭정까지 행했던 왕의 누나 풀체리아가 형식적인 남편으로 받아들여 즉위시킨 사람은 장군 출신의 마르키아누스(Marcian)였었다.

이에 반해 서로마황실에서는 불화와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는데 이것이 아틸라의 서로마 침공의 빌미가 된다. 사실상 섭정으로 아들을 대신하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 플라키디아가 사망한다. 그 이전 플라디키아의 딸인 호노리아는 신분이 낮은 그녀의 환자와 추문에 휩싸이고 이에 대한 징벌로 수도원에 갇힌 채 제위에 도전할 야심이 없는 인사와 강제적으로 결혼하게 강요되었다.모친과 남동생 사후의 권력을 거머쥘 야심에 불타다 하루 아침에 자유를 잃은 상태에 떨어진 그녀가 도움을 청한 곳은 동로마가 아니라 훈족의 아틸라였다. 호노리아는 대담하게 악의 화신이라고 불리우며 이미 여럿의 처자를 거느린 훈족의 영웅에게 청혼의 뜻으로 자신의 반지를 은밀히 보낸다.

사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만족왕이 다스리는 반달국은 훈네릭의 인질기간 동안 부마국 대접을 받느니 못받느니하는 상황이었다면 아틸라가 이번 일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 했다. 드디어 자신도 로마의 부마가 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아틸라는 청혼을 받아들여 부모와 형제 그리고 주요 신하들에게 버림받은 이 가엾은 공주를 구하기로 한다. 사실 정황을 보면 자청해서 호노리아가 청혼을 했을리는 없고 다만 심한 감시하 박탈감을 느낀 호노리아에게 아틸라의 밀정들이 그녀의 복권 나아가 권좌를 차지하겠다고 바람을 넣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부추겨 제권을 계승해야 할 것이라는 당치않은 기대를 갖게 했고 그의 이런 요구에 서로마는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는 규정으로 답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마제국과 아에티우스 그리고 자신과 훈제국을 모두 파국으로 몰고 간 아틸라의 서로마 원정은 이렇게 여러 모로 준비된 것이었으며, 항상 그렇듯 서로마, 동로마, 페르시아 라는 자신의 제국의 삼대 접경국가에 대한 수익성 측면의 평가가 면밀히 검토된 후 최종 결정된 것이다. 그는 서로마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서로마의 제권분쟁은 그가 억지로 꿰어맞춘 것이라 해도 서로마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프랑크족은 이미 전왕 클로이돈(Cloidon) 사후 형제간 왕위 다툼이 벌어져 장자는 자신에게로 와 있었다. 물론 위기의 발렌티니아누스와 아에티우스는 그의 동생을 불러들여 자신들의 동맹에 묶어두려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왕위 다툼을 통한 개입이 그동안 아틸라와 훈족이 자신들의 지배를 확장했던 방식이었다. 아틸라의 셈은 결국 프랑크족의 내분을 틈타 자신의 제국의 지배역을 갈리아 쪽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이는 그동안 협력자였던 아에티우스의 서로마제국을 보전하려던 그간의 노력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갈리아를 지키느냐 빼앗느냐. 일찌기 전신(戰神) 마르스신검을 찾아내 숭배하며 천하의 주인됨을 자처할 그가 자신의 포부를 실제로 펼칠 때가 드디어 왔다.

아틸라의 갈리아 침입 지도


그리하여 451년 1월 그는 게르만족 동맹들과 얼어붙은 라인강을 넘었다. 그 즈음 주요 동맹인 크로이돈의 장자가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인 오를레앙에 이르기까지 메스(Metz)와 랭스(Rheims) 등 몇몇 도시를 약탈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로마측에서 이를 막았던 이들은 성자로 남을 주교들이었지만 후대의 부회로 분류될 것이 많아 보인다. 파리를 구한 것은 성 주느비에프(Saint Genevieve)인데 기도로 아틸라를 피해가게 했다고 한다. 오를레앙으로 간 것은 이미 이 곳과 발랑스(Valence)에 알란인의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훈족과 아에티우스간 우호관계를 틈타 이루어진 것이었고 또한 루아르강을 지나는 요충지 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곳의 알란왕 상기반(Sangiban)이 아틸라에게 성문을 열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실제 성문은 열리지 않은 채 군인과 성민들은 일심 단결해 훈족의 포위를 견뎠다. 그리고 마침내 아에티우스가 그의 부관으로 훗날 황제가 되는 아비투스(Avitus)의 설득으로 데려온 비시고트군의 동맹을 이끌고 적에게 포위된 오를레앙 교외에 나타난 것이다. 성자 아니아누스(Anianus)가 마침내 본 이 신의 기적은 6월 14일이었다. 물론 이 동맹에는 프랑크족 등 다른 이민족 군도 있었으며 같은 민족인데도 갈라져 로마와 아틸라편에 각기 들어갔다. 아틸라는 원군을 보고 신중하게 상파뉴 지방으로 후퇴한 뒤 카탈루니아 평원(Catalaunian Plains)에서 추격하는 아에티우스의 동맹군을 맞는다. 아틸라의 원군에는 고트족 외에도 프랑크족, 사르마티아족, 아르모리카인, 훈족의 원수 부루군트인, 색슨족 등이 있어 그 만큼 많은 동맹을 거느린 아틸라군과의 엄청난 길이로 늘어선 대치는 장관을 이루었다.

이미 아틸라와 아에티우스는 과거의 동지에서 적으로 상황이 바뀌어 한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훈족의 샤먼은 예언하기를 이번 싸움이 훈족에 재앙이 될 것이나 적장도 죽음으로 승리를 얻을 것이라 하자, 아틸라는 눈의 가시가 된 아에티우스의 죽음을 예상하고 전투에 임했으나, 실제로 죽음을 무릅쓰고 아틸라에 맞선 적장은 비시고트왕 테오도릭이었다. 아에티우스의 배치는 의심스런 알란족을 중앙에 비시고트를 우익에 로마군을 좌익에 두는 것이었다. 아틸라 쪽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의 부족이 중앙에서 약한 적을 물리치려 했고 그 밖에 다른 동맹들을 양익에 배치하였다. 명성있는 아말가의 발라미르가 오스트로고트족을 지휘 비시고트를 상대하게 하였는데도 아틸라에게 전투는 쉽지 않았다. 아틸라의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고 고지를 서로 다툼에 한치의 양보가 없었다. 교전 중 비시고트왕 테오도릭이 전사하고 아틸라 역시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끝에 이틀날 로마군은 무수히 쌓인 적과 아군의 시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틸라는 테오도릭의 전사에서 만족하는 선에서 급히 퇴각하였으며, 갈리아에서의 힘의 균형을 생각한 아에티우스는 더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아틸라의 퇴각으로 모든 사태가 종료되리라 보았으나 그것은 훈과 아틸라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아틸라는 이듬해는 이미 운을 띄워논 이탈리아 침공을 실행에 옮겼다. 황제도 아에티우스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격퇴에 발벗고 나선 것은 당시 교황 레오였고 그는 아틸라와 회견하여 그의 철수를 약속받았다. 이제 다시 본영으로 돌아온 아틸라는 동로마를 상대로 한 전쟁을 준비하는 중 일디코(Ildico)라는 처자와 또 한 차례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니벨룽겐의 한탄 처럼 결국 게르마니아와 스키티아를 호령한 이 영웅은 마지막에는 그가 손에 거머쥐려던 2명의 여자로 인해 화를 본 셈이었다. 호노리아의 구원 요청에 많은 동맹부족들을 희생시켰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이제 호노리아를 얻기 전에 얻은 어린 신부와의 잠자리에서 이튿날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틸라의 최후였다.

아틸라의 살해

 
아틸라 사후 세 아들에게 찢겨진 훈제국은 붕괴된다. 헝거리초원에서 네다오 전투(Battle of Nedao)를 통해 454년 게피다이족에게 쫓겨난다. 장자 엘라크가 이 과정에서 전사하고 오스트로고트족에게도 쫓긴다. 형제인 뎅기지히(Dengizich)가 다뉴브 건너 동로마를 공격하다 살해당하자 유럽에서 훈족은 아예 사라진다. 이제 주도권은 아틸라 생전에 심복이었던 오스트로고트의 발라미르나 게피대족의 아르다닉 등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훈족의 이런 멸망과정 속에서 아틸라의 행동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마치 서로마 멸망과도 판박이 처럼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사력의 많은 부분을 이민족에게 의존한 이상으로 아틸라의 측근들은 서로마에서 추천한 관리거나 로마인들에 많이 있어서 실상 아틸라제국은 이미 많은 부분 이민족에게 의존되어 있었으며 아틸라 자신은 비록 자신의 힘을 몇몇 신임하는 인물들이나 영향력 있는 타부족 인사와의 개인적 친분이나 충성에 의지에 자신의 신민에게는 독재와 전횡을 일삼았고 비록 개인적 능력에 의해 갈리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동로마를 휩쓴 대병을 일으켰지만 종국에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그의 제국은 불과 수년을 버티지 못하고 와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영지는 상당기간 서로마 멸망 후의 서유럽과 같이 야만과 게르만의 유럽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눈엣가시였던 아틸라를 제거했던 서로마 제국도 결국 혼란에 휩싸인다. 모후의 사망후 여러 주변의 부추김 속에서 아에티우스로 부터 실제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려던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를 제거하지만, 그 자신도 오래 못가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되며 이로써 테오도시오스 가문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고 반달족이나 고트족의 도전은 더욱 거세지지만 더 이상 제국을 통합적으로 이끌만한 역량을 갖춘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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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몸젠 로마사 (번역) by DreamersFl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