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 동주(東周) 시대묘 발굴


2500-year old tomb found in E China

2,500년전이라고 하면 청동시대라고 해야할까? 철기시대라고 하여야 할까?
혹은 춘추시대인가? 전국시대인가?

애매하지만 여하간 이 당시의 묘가 발굴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오는 유물이 내게는 적어도 생소한 형태의 것이 나오는 것 같다. 발굴지는 산동성(山東省)의 절수현(浙水縣)이라고 하니 이 지역이 보통은 전국시대의 제(濟) 였을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애매한 시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위 사진과 같이 한 동기(銅器)에서는 명문(銘文)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실마리가 발견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수 없다. 다만 무사집안의 일원이라는 것 밖에는 추측할 거리가 없는가 싶다.




발견된 청동검도 검손잡이 자체는 언뜻 보기 화려한 것 같은데 이것이 중국식 검이 맞나 싶다. 아무튼 출토지가 경사진 산지라서 귀족의 묘치고는 특이하다는 설명이다.

춘추시대의 이 지역을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찾아 보니 거(莒)국이 이 곳에 있어서 그 군주의 성이 기(己)씨라고 하는데 이것은 은(殷)의 후예인 기족(箕族)과도 통하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인근의 제노(濟魯)의 핍박을 받다가 최종적으로 새롭게 중원에 도전해온 초(楚)에게 뿌리가 뽑히게 된다고 한다. 전국시대로 접어 든 기원전 431년의 일이라고 한다. 사실 이 지역은 그 거나라의 경읍(郠邑)이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제나라 같이 강대한 나라는 많은 인원을 여전히 순장한 묘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작은 읍에 불과해서 인지 그렇지는 않은듯 싶다.



마침 지도를 찾았습니다. 저기 제(濟)와 노(魯)라는 큰 나라 밑에 기(杞)와 거(莒)라는 소국 사이에 있는 지방인가 봅니다.




숨겨진 다빈치의 벽화 발견


다빈치의 숨겨진 걸작 발견 소식에 미술계 흥분

자초지종은 이렇다. 1500년대 플로렌스(Florence)에서는 시 청사 벽화를 당대의 두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두 사람에게 각기 맡겼다. 다빈치의 경우 막 모나리자의 그림을 그리던 대였다고 한다. 전자는 1364년 카스시나(Cascina) 전투를 후자는 1440년 앙기아리(Anghiari) 전투를 그렸는데 모두 미완성이었던 모양으로 둘 다 중도에 다른 일을 찾아갔다. 이 그림은 훗날 1560년대 청사의 홀 확장 중의 벽화를 바사리(Vasari)가 담당하게 되면서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 사라진 벽화에 대해 공부하던 세라키니(Seracini)란 사람이 바사리의 벽화에서


Cerca Trova



즉 "구하라 찾을 것이다"란 구절을 찾아낸다. 그리고 바사리 벽화의 복원된 부분에다가 구멍을 뚫고 마침내 그 비슷한 흔적을 발견한 모양인데 아타깝게도 더 이상 다빈치의 그림을 드러낼 방법은 없다고 한다. 역시 거장인 바사리의 벽화를 헐기 전까지. 내시경으로 계속 찍어서 합성사진을 만들수 있을 것 같긴 하다만은???? 

과연 어떻게 해결될지? [김주삼의 복원이야기] 다빈치 작품의 복원 논란


이 곳이 바로 시청 청사 홀 플라조 베치오(http://en.wikipedia.org/wiki/Palazzo_Vecchio)인듯 하다.



'Lost' Leonardo da Vinci masterpiece may be hidden in 'secret compartment' in Florence  palazzo - as hi-tech drill reveals traces of paints used in Mona Lisa
Read more: http://www.dailymail.co.uk/sciencetech/article-2113830/Leonardo-da-Vinci-masterpiece-hidden-Palazzo-Vechio-secret-compartment-Florence.html#ixzz1sIgPEqzp

그리스 재정 위기와 페리클레스

<복원중인 파르테논 신전>


한 그리스사 학자가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Greeks today might ask: What would Pericles do?

유럽은 물론 전세계인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든 경제 위기를 당하고도 갈팡질팡한 모습 혹은 그 책임을 외국인에게 돌리던 모습을 보였던 그리스가 실은 굉장히 다급하였는지 마침내 그들의 자랑인 그리스 문화재에 대한 파격적인 "세일"을 단행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단, 국내기사를 살펴보면 위 기고자는 실제상황보다는 더 과장되게 쓴 것 같아 보인다.

그리스 재정난, 유적지 촬영비 ‘반값 이하로 뚝’
그리스, "한푼이라도"..아크로폴리스 임대료 파격인하

이 기사상으로는 기존의 임대료를 인하하여 수입을 올리고자 한 것이지 새삼스레 개방하지 않던 것을 개방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관광가이드라고 하는데 역사학자들도 있었다.

일단 제임스 롬(James Romm)에 의하면 전쟁비용에 쫓겨서 페리클레스(Pericles)가 신전을 약탈하였다고 하며 이것이 당시의 종교적 신성모독이라고 했다. 비록 그런 행동은 페리클레스의 광팬이자 유명한 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던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밝혔음에도 말이다. 사실 페리클레스의 이런 행동은 사실 처음 듣는다. 오직 페리클레스가 흔히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을 건설 등을 주도해서 아테네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로 만들었다는 플루타르크(Plutarch)의 이야기만 잘 알려져 있다. 플루타르크도 페리클레스의 다른 정치적 재능들과 함께 그가 남긴 문화적 업적들도 입이 닳도록 칭찬하기는 마찬가지다. 아테네 제국의 부와 영광의 시대를 이끌고 그 파르테논을 비롯한 굉장히 화려한 건물들로 그것을 오늘날까지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아는 페리클레스가 신전을 약탈했다니?

롬씨는 묻고 있다. 이런 위기의 경제 상황에서 과연 페리클레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의 답은 페리클레스라면지금의 그리스인들이 하는 행위를 존중했을 것이라고 하며 그의 팬인 투키디데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근거는 당연히 페르클레스 자신의 전쟁수행의 예이다. 이에 대해 내 판단 적어도 한국적 상황을 좀 대입해본 내 생각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그리스와 같은 그렇게 귀중한 문화재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개방되더라도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또 경제적으로 생각해도 개방으로 인한 복원수리비용이 늘어난 수입을 넘어서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 롬씨의 비유가 좀 적잖이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이다. 투키디데스의 글을 찾아보니, 사실 페리클레스가 신전을 약탈할 것을 제안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그 신전에 안치된 보물들을 롬씨가 아테나 신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신전은 대개 공적 금고이며 따라서 파르테논 신전의 보물들은 국고(國庫)로 원래 전비 등에 쓰려고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 파르테논 신전을 대여하게 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판이하다고나 할까? 투키디데스는 전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만 아테네의 패권으로 확립된 델로스 동맹들로부터 들어올 세입은 6,000 탤런트뿐인데 이 돈으로 펠레폰네소스 측과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있는 잔고 6,000 탈렌트 외의 모든 보물들과 다른 신전들의 국고까지 탕탕털어서 시급한 당면문제인 전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펠로폰네스 전쟁사 2권 (6장)]. 이것이 롬씨가 말하는 그 습격사건인 듯하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IMF사태의 금모으기운동 대신인 셈이다. 아무튼 국가적 위기를 만나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이런 생각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고나 할까.

*이명박 정부의 그간의 행적들이 그런 우려를 더 크게 한다.

‘정상 부인들 만찬’ 들러리 선 박물관 : 이런 짓은 그렇다 치자,

http://veritasest.egloos.com/1788547 : 이런걸 복원이라고 해놓질 않나,
문화재 개방 다시 찬반논란 가열 : 숯불구이 파티를 열지 않나 말이다. 

난 사실 수십번씩 보수 중수한 저런 건물들의 문화재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고 남대문 복원같은 것도 찬성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국격은 보여주어야 하는데 궁궐에서 술판을 벌리는게 네로나 연산군의 행동이나 무엇이 다른가 모르겠다. 사실 더 화가 나는 것은 네로나 연산군은 교양적 안목에서 만큼은 나름 뛰어난 인물들이었다는데 이명박은 비록 대학졸업한 간판만 있지 하는 행동은 고졸수준도 못된다. 그것조차 고졸에 대한 모독이다. 하긴 한국인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은 아닐지?

 

게르만족과 헤어스타일


로마 시대의 게르만족에게 헤어스타일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그들 부족 중 수에비족은 빗질을 통해 독특한 매듭을 짓는 헤어스타일로 전장에 나갔고 곧 이 풍속은 많은 다른 게르만족에게 까지 퍼져나갔다고 한다. [게르마니아 38].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노예신분과 자유민을 구분해주었고 높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족장들은 더욱 우아한 스타일로 머리 장식을 했다고 한다. 채티(Chatti)족은 턱수염과 머리를 성인이 되어 한 명의 외족 전사를 죽일 때까지 기르게 했다고도 한다[게르마니아 31].

그래서 그런지 게르만 족이 남긴 유물 중에는 빗(comb)가 많이 있는 줄로 안다. 오늘 날 독일의 성(姓) 중에도 Kamm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기도 하다.

Scientists find runes on ancient comb

최근엔 멋진 빚 하나가 출토된 모양인데 거기에서 게르만족의 루닉 문자도 녹각(鹿角)의 빗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 같다. 2세기의 유물로 대략 게르만족이 루닉 문자를 쓰던 것이 그 시기로 생각되어 별달리 놀랄 것도 없는 일인 듯하다. 이후 게르만은 로마문자를 사용하지만 더 늦은 시기 북유럽에서는 이 사용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 우리나라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소위 몽골의 돌궐비문 역시 루닉문자로 오인되어서 스웨덴 탐사대가 조사하러 갔다가 헛탕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생김새는 비슷하나 음가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 즉 고구려를 뜻하는 "뵈클리"라는 말이 나왔다던가?


<출토된 수에비 매듭의 인골>

신앙과 생활방식(13장 주석 붙임) - 몸젠로마사3권 39

제13장 신앙과 생활방식(Faith and Manners)

로마인의 엄격성과 로마인의 긍지  

로마인의 경우 삶이란 엄격한 제한의 조건하에 보내지는 것이며 그가 귀한 신분일 수록 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모든 강한 습관이 그가 사상과 행동에서의 좁은 범위내에 그를 구속하였고 신중하고도 엄격한 혹은 특징적 라틴식 표현을 이용하면 슬프고 엄한 삶이 그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그의 집안을 잘 정리해두고 공공문제에서의 그의 조언과 행동에 대한 그의 역할을 사나이답게 견디는 것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인 공동체 성원외의 무엇이 될 소원이나 힘도 가지지 않은 반면애 그 공동체의 영광과 힘은 모든 개별 자치회에 의해 그의 이름과 그의 저택과 나란히 옮겨지는 개인적 소유물로서 공감되었으며, 이렇게 한세대한세대 무덤으로 들어가고 각각 차례로 고대의 영예로운 족속에 대한 신선한 새기운은 추가함에 따라 로마의 고귀한 가문들 사이의 군집적인 고귀성-이같은 것은 지구상에 다시 보이지 않았고 위대한 만큼이나 이상했지만 그 흔적은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 보더라도 이를테면 다른 세상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였다-에 대한 감각이 그 강한 시민적 긍지로 부풀어 올랐다. 이 시민의식이 억압되지 않으면서 시민들간에 유행하여 일생동안 품에 꼭 잠긴 견고한 단순성과 평등성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것은 그 강력한 의식의 아주 독특한 것중 하나이며 사후에 표현을 찾을  있는 것만 오직 허락되었다. 하지만 그때 특별한 사람의 장례의 의식 중에 분명하고 집약적으로 보여져서 이 의례가 로마 삶의 다른 어떤 현상보다 후대를 사는 우리에게 로마인의 놀라운 정신의 희미한 윤곽을 가져다 주는데 더 알맞는다.

로마인의 장례

공공 포고꾼의 "저쪽 전사가 죽었다. 누구든 할 수 있으면 그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Lucius Aemilius)를 에스코트하러 가게 하시오. 그는 그의 집에서 낳았습니다"라는 소환으로 자치회원 이 출석하도록 초대받는 식으로 독특히 진행된다. 울부짖는 여자와 악사와 춤꾼 무리에 의해 열렸다. 후자의 하나는 고인과 처럼 차려입고 가면을 쓰며 의심없는 몸짓과 행동으로 다시 한번 잘 알려진 사람의 외모를 대중에게 다시 한번 기억케 한다. 그리고서 근엄한 면으로 가장 크고 가장 독특한 부분-조상들의 절차(procession of ancestors)-이 뒤따르는데, 그 전에 그 가장행렬의 모든 나머지들이 비교적 흐려져서 진짜 로마식 계급의 사람들이 상속인에게 장례 의식을 그 절차에만 한하도록 명한다. 우리는 이미 귀족조영관직(curule aedileship)이상 자리의 정무관을 채우는 이런 조상들의 얼굴의 밀초로 뜨고 칠한 가면-가능한 한 사후에 본떠지나 왕정 시대 이전 시기까지 거스를 때조차 부족하지 않음-이 가정의 홀의 벽을 따라서 있는 나부 벽감(壁龕)에 자리하게 두었으며 그 집의 주요 장식으로 여겨졌다. 죽음이 가족내에서 일어났을 때 적당한 사람들 주로 배우들이 이 얼굴가면과 그에 맞는 공식적인 의상을 차리고 장례의식에 참여하여서 그 조상들-각자 자신의 생애 주요 의복과 금수놓은 개선장군의 옷과 감찰관(censor)의 자주빛 어의(御衣)으로 가장자리 진 예복과 집정관(consul)의 어의를 차려 입었다-은 모두가 의장전차에 타고 사자(死者)에 대한 마지막 에스코트를 하였다. 자주빛과 금수놓은 덮개와 질좋은 리넨(linen)의 옷감 덩이가 펼쳐진 상여 위에 고인(故人) 자신이 마찬가지로 그가 채웠던 가장 높은 관직의 의상을 완전히 차기로 그가 베은 적의 갑옷과  장난이든 진심이든 그가 얻은 화관(花冠)에 둘러싸인 채 누었다. 상여 뒤에 장식없이 완전히 검게 차려입은 문상객, 머리에 베일을 쓴 고인의 아들들, 베일안쓴 딸들, 친척과 씨족원, 친구들, 피보호인(client)들과 피해방인(freedman)들이 갔다. 이렇게 그 행렬이 포룸(Forum)을 행해 지나갔다. 사체가 선 채로 놓였다. 그 조상들이 그들의 전차들에서 내려와 로마 대관 의자(curule chair)에 착석하였던 것이며 아들과 고인의 가장 가까운 외부 친족이 운집한 대중들에게  간단한 강연으로 그 주위에 원 대형으로 앉은 각각의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최근에 죽은 사람에 대해 안내하기 위하여 단에 올랐던 것이다.

이는 야만스런 관습이라 불릴 지도 모르고, 예술적인 감이 넘치는 민족이라면 확실히 죽은 자의 이 이상한 부활의 지속을 완전 문명화된 문명의 시대상에 까지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지만 폴리비오스(Polybius)처럼 존경심에는 내켜하지 않는 그리스인(Greek)들 조차 이 장례의식의 유치한 광경에 큰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로마적 생활방식내의 진지한 엄숙성과 일정한 움직임과 자랑찬 고귀함과 일치하는 관념인데 이승을 하직한 세대들은 생자(生者)들 사이를 이를테면 육화된 채로 걸어야 하며 수고와 영예에 지친 자치회원(burgess)이 선조에게로 모여들 때 이 선조들 자신이 포룸에 그들 무리에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타야 한다는 것이다.

신(新) 헬렌주의(Hellenism)

그러나 로마인(Roman)들은 지금 변이되는 위기의 지점에 도달했다. 로마(Rome)의세력이 더이상 이탈리아(Italy)에 갇히지 않고 동방으로 서방으로 훨씬 더 멀리 뻗어간 지금, 이탈리아의 오랜 안방생활의 날들이 끝장나고 헬렌화한 문명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탈리아가 그리스(Greece)의 영향에 역사이래 따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어떻게 젊은 그리스와 젊은 이탈리아가 지적인 충격을 주고 받았는지-그들 양자가 일정 정도의 단순성과 창조성으로-와 어떻게 더 늦은 시기 로마가 그리스의 언어와 발명들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데 더 외부적 방식을 따르도록 노력하였는지를 이전에 보였다. 그러나 현 기간에의 로마인의 헬렌주의(Hellenism)는 그 결과는 물론 원인에서 본질적으로 신기원의 무언가였다. 로마인들은 지적으로 더 풍요로운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동시에 말그대로 자신들의 정신적 문화의 철저한 부족에 놀라기 시작했고, 영국인과 독일인같은 예술적 재능있는 민족들조차 비참한 프랑스인의 문화를 그 간극을 메우는데 이용하기를 그들 자신의 다산성(多産性)의 휴지(休止)에서 무시하지 않았더라도 이탈리아 민족이 지금 헬라스(Hellas)의 지적 발달의 방탕한 쓰레기는 물론 찬란한 보물에 대해서 끓는 열정을 가지고 돌진한다는 것에 놀라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인을 무저항속에 헬렌적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한 더욱 심오하고도 깊은 뿌리의 충격이었다. 헬렌적 문명은 훨씬 의심할 바 없이 그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하였지만 더 이상 그것은 헬레적(Hellenic)이 아니었고 실제 휴머니즘적이며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 다른 민족들의 뭉치 하나를 지적인 분야와 일정 정도 정치적 분야에서와 완전히 하나로 주조하는 문제를 풀었고 동일한 작업이 로마에 더 넓은 규모로 위임되는 지금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나머지 유산과 함께  헬렌주의(Hellenism)를 인계했다. 헬렌주의(Hellenism)는 그런까닭에   더이상 단순한 자극이나 보조적인 영향이 아니었다. 이는 이탈리아 민족의 바로 그 핵심을 관통했던 것이다. 물론 이탈리아의 원기있는 안방 생활은 외국적 요소와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의 농주가 그 영역을 그 수도의 범존종(cosmopolite)에게 내어준 것은 가장 맹력한 투쟁을 겪은 이후였고, 독일(Germany)에서 프랑스인의 코트(French-coat)가 독일 민족적 후록코트(frock-coat)를 부르는 것처럼 헬렌주의에 대한 반작용은 로마에서 그리스의 영향에 원리상 맞서는 경향을 일깨워 이른 세기에 모두 외래적인 분위기로 그렇게 하면서 순전히 어리석음과 부조리속으로 아주 빈번히 빠져들었다.

정치에서의 헬렌주의 

인간의 행위나 사상의 어떤 부문도 신구경향(新舊傾向) 간의 투쟁에 영향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정치적 관계들조차 그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에 걸맞는 실패를 이미 묘사하였지던 헬렌인(the Hellenes)들을 해방시키려는 기발한 과업, 왕들에 반하여 공화국의 공동 이익에 관한 헬렌적인 것과 같은 친밀한 관념, 동방적 전제주의를 희생시킨 헬렌적 정치(Hellenic polity)를 확산시키려는 욕망-예로 마케도니아(Macedonia) 처리를 규제하는 것을 돕는 두 원리들이다-들은 새 학파의 고정된 관념들로, 이는 마치 카르타고인(Carthaginian)들을 겁내는 것이 구경향의 고정된 관념이고 카토(Cato)가 후자를 우스꽝스런 접근으로 밀어넣었음에도 헬렌주의애호(Philhellenism)는 이제나 저제나 적어도  꽤 바보스런 만큼이나 낭비에 탐닉하였다. 예컨대, 안티오코스 왕()의 정복자는 그 자신의 조상(彫像)을 그리스 의상을 입횐 채 카피톨()에 세웠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좋은 라틴어로 아시아티구스(Asiaticus)라고 부르는 대신에 무의미하고 변친적인지만 굉장하고 거의 그리스 적 별명인 아시아게노스(--Asiagenus--)[1]를 취하였다. 지배 민족의 헬렌주의를 향한 이 태도의 더 중요한 결과가 라틴화하는 과정이 헬렌인을 마주치는 곳 외에는 이탈리아(Italy)의 어느곳에서든 바탕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이탈리아(Italy) 안의 그리스인들의 도시들은 전쟁이 그들을 파괴하지 않은 한은 그리스로 남았다. 로마인들이 스스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아풀리아(Apulia)는 바로 이 시대에 들어 구석구석 헬렌주의에 침투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거기의 지역 문명은 쇠퇴하고 있는 헬렌적 문화의 수준에 그 측면에서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은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리스 명문(銘文)을 균일하게 제공하는 도시들의 수많은 동전들과 취향보다는 야망과 야함에 홀로 더 의지해 이탈리아의 그 부분으로 운반된 그리스양식을 따른 채색된 점토단지의 생산품들이 아풀리아가 완변하게 그리스 습성과 그리스 예술을 채택해왔음을 보인다.

그러나 현 시기의 헬렌주의()와 그 민족적 적대자들 사이의 실제 투쟁이 신앙(faith)과 생활방식(manners)와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수행되었으며, 그 충돌이 가진 무궁무진한 형태와 완리에 대한 요약적 관점을 제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든지 간에 우리는 이 원리들의 큰 불화의 몇몇 묘사를 시도하는 것을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족 종교와 불신앙 

옛 단순 신앙이 여직 이탈리아인들에 대해 생생한 영향을 유지한 정도는 이탈리아인의 경건성에 대한 이 문제가 동시대 그리스인들 중에 끼친 존경 혹은 경이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보여진다. 아에톨리아인(Aetolian)들과의 다툼의 경우에 로마의 최고사령관에 관하여 전투 중 그가 한 사제처럼 기도하고 희생하는데 오로지 전념하였다는 보고가 있으며, 이에 폴리비오스(Polybius)가 그의 다소 퀴퀴한 설교로 그의 나라사람들을 이 경건성의 정치적 유용성에 대해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국가는 단지 현자로만 구성될 수 없으며 이런 의식이 다수를 위해 아주 편의적이라고 훈계하였던 것이다. 

종교적 경제

그러나 이탈리아가 여전히 민족 종교를 소유하였어도-헬라스(Hellas)에서는 오래전에 단순한 골동품 수집적 호기심이었던 것, 이미 가시적으로 신학(神學)으로 골화(骨化)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앙 위를 살금살금 걷던 무기력은 어느 곳에서도 아마 신성한 목무와 사제직의 경제면에서의 변경함 만큼이나 특징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신에 대한 공공 복무는 더 싫증 나게 되는 것 뿐아니라 우선 훨씬더 값비싸게 되었다. 558년, 옛날의 세 단체인 복조관(卜鳥官, augur), 제사장(pontifice), 신탁책임자에 세명의 축제주(banquet-masters, tres viri epulones)로 구성된 네번째가 더해졌는데 오로지 신의 축제를 감독하는 목적에서였다. 신들은 물론 사제들은 공평히 연회식을 즐길 자격이 있었다. 새 입법들은 그러나  모든 각 단체가 스스로 열정과 헌신으로 경쾌한 일에 다함에 따라 그런 면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직자적인 잔치들은 성지자의 면제권에 대한 주장을 동반하였다. 사제들은 심히 곤란한 때에 조차 공공 부담의 면역을 주장했고 아주 곤란한 논쟁이후에야  연체된 세금의 지불함에 승복했다(558). 공동체는 물론 개인에게, 경건은 점점더 비싼 물품이 되었다. 종교적 목적을 위한 기부를 입법하는 것과 일반적으로 항구적 금전상의 의무를 수행하는 관습은 오늘날 로마 카톨릭 나라들에서의 성행과 비슷한 방식으로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했다. 이 기부들-최상으로 영적이며 동시에 최상으로 국내에서 법적인 권위인 제사장(pontifice)들에 의해 합법적으로(de jure) 부동산을 획득한 모든 상속인과 다른 사람에게 위임되는 진짜 부담-이 재산에 대해 극도로 억압적인 부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희생제의적 의무가없는 상속"은 로마 속담으로 우리의 "가시 없는 장미"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 실체의 10분의 1의 헌정은 너무나 흔해서 매달 두번 공공적 여흥이 로마(Rome)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에서 행렬로 부터 주어졌댜. 제신의 어머니(Mother of the Gods)에 대한 동방적 숭배와 함께 년례적으로 어떤 일정한 날에 날에 집집마다 누비며 페니수집(penny-collections)을 요구하는  것(stipem cogere)을 되풀이하는 관습이 경건한 소란행위들 중에 로마로 수입되었다. 드디어 사제와 점쟁이의 하위 계급이 타당하게도 그에 대해 지불받지 않고는 어떤 복무도 하게 하지 않았으며, 의심을 초월할 예로  로마의 극작가는 그의 생애에서 부부사이의 침실대화에서 경건한 복무에 대한 설명을 요리사와 간호사와 다른 관례적인 선물들에 대한 설명에 견줄수 있는 것임을 표했다.

Da mihi, vir,(여보, 내게 좀 줘요!) quod dem Quinquatribus Praecantrici, conjectrici, hariolae atquc haruspicae; Tum piatricem clementer non potest quin munerem. Flagitium est, si nil mittetur, quo supercilio spicit.( 큉쿠아트로스Quinquatrus에 여자마법사에게, 해몽가에게, 점술문에게, 신성녀에게 줄 것을. 그 밖에도 내가 내가 공손함에 있어 속죄하는 여자에게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Henry Thomas Riley, 1912 역 Pl. Mil. 3.1 중 참고)

로마인들은 "금(金) 중의 금(金)"을 전에 그들이 "금(金) 중의 은(銀)"을 창조했듯이 창조하지 않았다[2]. 그럼에도불구 그는 신앙생활의 최고이면서 최저의 반경내 대해 실상 같이 군림하였던 것이다. 라틴의 민족 신앙의 오랜 자랑-그 경제수요의 완화-이 돌이킬수 없이 가버렸다.

신학

동시 그 고대적 단조로움이 또한 이탈했다. 신학 즉 이성과 신앙의 그럴싸한 새끼는 이미 자기의 짜증스런 장황함과 근엄한 우둔함을 오랜 안방의 민족 신앙에로 소개하면서 그렇게 그 신앙의 정신의 진면목을 축출하는데 몰두하였다. 유피테르(Jupiter)의 사제의 의무와 특권들의 카탈로그(catalogue) 예컨대 탈무드(Talmud)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자연적 규칙-어떤 종교 복무도 결점이 없지 않다면 신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단일 희생이 연속적으로 30번 다시 또 다시 범해진 잘못으로 반복되어야만 했을 그리고 신성한 복무의 일부를 형성하는 축제놀이가 주재 정무관이 언행에서의 약간의 빚나가거나 그 제악(祭樂)조차 잘못된 시간에 멈추없을 때는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새로 시작되어 빈번히 연속적으로 일곱번 정도나 여러번 할 정도까지 실제상황으로 밀어넣었다.

반종교적 정신

양심적임에 대한 이 과장은 이미 발단된 무기력의 증세의 하나이며 그에 대한 반작용-냉담함과 불신-이 곧 나타나지 않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1차 퓨닉전쟁(Punic war)에서 조차(505) 집정관 자신이 전투 전에 점괘(auspice)에 상담할 것을 드러내놓고 농을 하는 예가 일어났다-사실이지 집정관은 클라우디우스라는 특이한 씨족에 속하였는데 선과 악에서 한결같이 그 시대의 앞자리에 있었다. 이 시대의 끝을 향하면서 불평들이 큰소리로 퍼졌는데 복조관(the augur)의 말씀이란 무지된다는 것이었고 카토(Cato)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수많은 고대의 복조관과 점괘들이 그 단체의 구석구석 퍼진 나태를 통해 세인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루키우스 파울루스(Lucius Paullus)같은 복조관은 사제직에서 과학을 그리고 단순한 칭호만이 아닌 것을 보았는데 이미 드문 예였고, 정부가 더 드러내놓으면서 서슴없이 그 정치적 설계의 성취를 위해 점괘를 채용할 때 다시말해 폴리비오스(Polybius)의 견해에 따라서 민족 종교를 크게 공공에 부과를 하는데 유용한 미신으로 다루었을 때에는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이 닦이는 곳에 헬렌(Hellen)의 반종교적 정신은 자유로운 길을 찾아냈다. 예술에 대한 시작된 취향과 연관 속에서 신에 대한 신성한 상(像)이 카토(Cato)의 시대만큼 일찍부터 부자들의 방을 장식하는데 다른 가구처럼 채용되기 시작했다. 더 위험스런 상처가 일어나는 문학에 의해 종교에 가해졌다. 그것은 실상 드러내놓은 공격에 감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수단에 의해 종교 개념에 행해질 듯한 그런 직접적인 추가들-예로 엔니우스(Ennius)에 의해 그리스 우라노스(Uranos)를 흉내낸 로마 사투르누스(Saturnus)로 부터 만들어진 파테르 카엘루스(Pater Caelus)-헬렌(Hellen)적이긴 해도 대단한 중요성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Rome)에서 에피카르(Epichar)와 유헤메로스(Euhemerus)의 교리의 확산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후기 피타고라스학파(later Pythagorean)가 옛 시칠리아(Sicily) 극작가인 메가라(Megara)의 에피카르무스(Epicharmus)의 저술(약 280년)에서 추출해내고 적어도 대부분 그의 이름 아래에 유통되었던 시적 철학은 그리스의 신들 속에서 자연적 실체를 제우스 안에서 대기를 영혼 안에서 해의 먼지 입자 등등을 보았다. 이 철학의 본성은 있어서는 스토아 교리처럼 그 일반적인 외형의 요지에 로마 종교와의 친연성을 가진 한에 있어서 민족 종교의 가치를 그것을 우화로 분해함으로써 저하시키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종교에 대한 준(準) 역사적 분석은 메세네(Messene)의 유헤메로스(Euhemerus)의 "신성한 비망록(Sacred Memoirs)"(약 450년)안에 주어졌는데, 저자가 외국땅의 경이적인 사건 중 여행에 대한 보고서 형태아래서  쇠의 신이라는 것에 관한 유행하는 설명을 대한 철저한 문서적 검토하게 해서 신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결론으로 끝냈다. 그 책의 성격을 가르키려면 크로노스(Kronos)의 게걸스레 먹는 이야기가 초기 시절의 식인풍습(cannibalism)의 존재보부터 일어낢과 제우스(Zeus) 왕에의한 제거라고 설명되었다는 사실 하나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 무미건조함과 아주 분명한 목적을 극복한 것이든 덕을 본 것이든 그 생산은 그리스(Greece)에서 가버치 있는 성공은 아니었고 거기서 유행하는 철학과 공동으로 죽은 종교를 묻는 것을 도왔다. 엔니우스(Ennius)가 이미 라틴어로 에피카르모스(Epicharmus)와 유헤메로스(Euhemerus)의 악명높게도 파괴적인 저술을 번역했단느 것은 종교와 새 철학간 의식·표현된 적대감의 주목할만한 지표다. 그 번역자들은 그 공격이 오직 그리스인의 신을 향할 뿐이지 라틴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애원함에 의해로마 경찰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했을는지 모르지만, 그 회피는 웬만큼 투명한 것이었다. 카토(Cato)는 이들 경향에 대해 그들이 어디서 그를 만나건 무차별적으로 자신 특유의 신랄함으로 공격하는 것과 소크라테스(Socrates)조차 도덕(moral)의 부패자이자 종교공격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신의 견지에서 매우 올바른 것이었다.

안방과 해외의 미신

이렇게 옛 민족종교는 가시적 쇠퇴중에 있었고, 태고의 숲에 거대한 나무들이 뿌리뽑히면서 흙은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던 가시덤불의 성장으로 뒤덮히게 되었던 것이다. 다양한 빛깔의 토착 미신들과 외국의 사칭들이 서러 뒤섞이고 경쟁하고 충돌하였다. 어떤 이탈리아 족속도 옛 신안을 새 미신으로 이렇게 변이하는 것에서 면제된 채 남지 못했다. 내장과 번개에 대한 구전이 에트루리아인(Etruscan)들 사이에서 전해지듯 새들을 보고 구렁이를 조종하는 자유로운 기법들이 사벨리인(Sabellian)들과 더 특별히 마르시인(Marsian)들 사이에서 호화로울 정도의 번성을 누렸다. 라틴 민족들 사이에서 조차 그리고 실제로 로마 자체내에서 우리는 비슷한 현상과 상대적으로 덜 뚜렷히 말하지는 않지만 만나게 된다.  이러한 예가 프라이네스테(Praeneste)의 lots 이며 573년 로마에서의 주목할 만한 발굴과 누마(Numa) 왕의 무덤과 사후(死後) 유문(遺文)이었는데, 이들은 이상하며 들어본적 없는 종교 의식을 규정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잘믿는자들을 유감스럽게도 이보다 더 배우도록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책들이 아주 새것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연관있었다. 원로원이 그 보물에 손을 얹고 그 말이를 즉시 불구덩이에 던지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안방의 제조업은 이렇게 훌륭히 예상될수 있었을 어리석으므이 수요를 아주 충분히 맞추었지만 로마인들이 그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동방적 신비주의에 의해 그 시대의 탈민족화되고 침투를 받은 헬렌주의(Hellenism)는 불신앙뿐 아니라 가장 공격적이고 위허한 형태로 이탈리아에 미신을 소개했으며 이 엉뚱한 변화는 게다가 엄밀히 그것이 외국의 것이라서 아주 특별한 매력을 지녔던 것이다.

키벨레(Cybele)의 숭배

칼데아(Chaldea)의 점성가와 토착 주조자(casters of nativities)는 이미 6세기 이탈리아(Italy) 구석구석 버졌지만 더욱 중요한 사건-실상 세계사상 한 시대를 만든 것-은 프리기아(Phrygia)의 제신의 어머니(Mother of the Gods)를 로마 국가의 공적 인정된 신성성에의 수용이었으며, 그에 대해 정부는 한니발 전쟁(Hannibalic war )의 끔찍한 지난 세월들 중에 그 동의를 주어야만 했었다(550). 한 특별한 사절이 그 목적으로 소아시아(Asia Minor)의 켈트족(the Celt) 지경상의 한 도시인 페시누스(Pessinus)로 보내졌고 그 장소의 사제들이 대모(大母) 키벨레(Cybele)의 현현(顯現)으로 외국인들에게 자유롭게 보인 거친 자연석은  비할바 없는 허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진짜로 영속적으로 즐거운 일들을  기념하는 것을 통해 성원이 돌아가면 서로를 접대하는 클럽들이 보다 상층류에서 조직되고 실제적으로 작당패의 형성에 대한 흥기되는 경향을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키벨레(Cybele)의 쿨투스(cultus)에 인정된 허락과 함께 동방적 숭배는 로마에서 공식적인 기반을 마련하했고 정부는 새로운 신들의 거세된 사제들이 그들 스스로 부르듯 켈트족(Celt, Galli)으로 남아야 하며 어떤 로마 자치회원도 이 신성한 환관주의(eunuchism)에 전념해선 안된다는 것을 엄히 주장하였을 지라도 "대모(大母)"의 야만적인 겉치례-그녀의 사제들은 선두에 수석 환관과 동방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fife)와 케틀북(kettledrum)의 외국 음악의 도로 행렬 지으며 집빚마다 구걸하는 것-와 반은 육감적이고 반은 수도자적인 전 행동들은 민중의 감정과 견해에 가장 실질적 영향을 행사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바커스(Bacchus) 숭배

그 효과는 오직 너무나 빠르고 두렵게 드러났다. 몇년후(586) 가장 끔찍스런 성격의 의식이 로마 당국에 인지되었다. 바커스 신을 기리는 비밀야간집회가 처음 에트루리아(Etruria)에 그리스 사제 하나를 관통해 소개되었고 암처럼 번지면서 로마에 급속히 닿아서 모든 이탈리아에 자기 확산되어 퍼졌는데 모드 곳에서 가정을 부패하게 하며 비할바 없는 음란함과 증언위조와 독살의 가장 극악한 죄악을 야기하였다.  7000이상이 처벌 판결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 죽음을 받았으며 정력적인 결의가 미래에 포고되었다. 그들은 그 지속을 재압(再壓)하는데 성공하지 못해 6년후(574) 그 문제에 닥친 정무관은 불평하여 3000명 이상 유죄판결되었는데 여전히 그 악의 끝이 안보인다고 말했다. 

억제조치

물론 모든 지각있는 사람들은 종교의 이런 사이비 형태-공화국에 대해 상처주는만큼이나 이상한 것이다-에 대한 비난에 동의했다. 옛날 신앙에 대한 경건한 고수자들과 헬렌적 계몽의 당파들은 그 미신에 대한 조소와 격분에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카토(Cato)는 그의 집사에게 "가정 내와 콤피탈리아(Compitalia)의 길옆 제단 이외에서는  공여(供與)가 제공되어서는 안되거나 그의 주인의 지식과 명령없이 자기 측에 공여(供與)가 제출되어선 안되며 절대 하루스펙스(hariolus)나 하리올루스(hariolus)나 칼다에우스(Chaldaeus)를 샆펴서는 안된다"고 하는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 사제가 그의 동료를 만났을 때 웃음을 참는 것을 고안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잘 알려진 문제는 카토(Cato)에게서 유래하였고 주로 에트루리아의 하루펙스(haruspex)에 적용되었다. 아주 같은 정신에서 엔니우스(Ennius)는 진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문체로 탁발하는 점쟁이와 지지자들을 검열하였다.

Sed superstitiosi vates impudentesque arioli, Aut inertes aut insani aut quibus egestas imperat, Qui sibi semitam non sapiunt, alteri monstrant viam, Quibus divitias pollicentur, ab eis drachumam ipsi petunt.(허나 미신적 시객-vates- 돌팔이 예언자-arioli-가 일은 혐오하거나 제정신이 나갔거나 결핍에 지배되어 다른이들이 어디로 갈지 그리고 어떤 길을 취할 지 지시하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네. 그들이 부를 양속하는 사람으로 부터 구걸하는게 동전 하나네. - William Armistead Falconer 역 Cic. Div. 1.132 참고)

그러나 이런 시기 서음으로 이성이 반이성에 대한 지는 경기를 시연했다. 정부는 의문의 여지 없이 개입했다. 경건한 사기꾼들은 경찰에 의해 처벌되었고 축출되었다. 특별하게 거행된 것이 아닌 모든 외국의 숭배가 금지되었다. 상대적으로 무죄한 프라에네스테(Praeneste)의 상대적으로 무고(無辜)한 뽑기신탁에의 상담조차 512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이미 우리가 말한 것처럼 바카스축제(Bacchanalia)에 참여한 자는 굉장히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일단 남자들 머리가 철저히 돌았을 땐느 보다 높은 권위의 명령도 다시 제대로 되돌려 놓는 것에 소용이 없었다. 정부가 얼마나 영보해애 했는지 혹은 어쨌든 그러했는지는 진술된 것으로 부터 분명하다. 로마 관습은 그 아래 국가가 어떤 위기 상황에 에트루리아의 현자에게 상담을 하고 정구가 따라서 에트루리아(Etruria)의 귀족 가문내의 에투루리아 구비전승의 전달을 물론 부도덕하지 않고 여자들에게는 제한된 데메테르(Demeter)의 비밀스런 숭배에 대한 허가와 함게 아마도 외국 의식을 보다 이르게 무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냉담히 채택함에 위치시켰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신의 어머니(Mother of the Gods)의 숭배의 인정은 정부가 아마도 그것 자체에 의해 침투받은 깊이 조차에 대해 새 미신의 존재에서 느낀 약점의 잘못된 신호였으며, 이는 같은 방식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무지 같은 것 이나 더 나쁘게 말해 당국이 그렇게 큰 무대의 바커스축제(Bacchanalia)같은 절차에 대항하여 나중의 재해정보에 대해 겨우 발만 들여놓을 뿐이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보였다.

생활방식의 엄숙성  

대(大) 카토(Cato)의 생애에 관해 우리에게 내려오는 그리은 그 시기의 존경받는 자치회원(burgess)들의 생각을 따라 어떻게 로마인의 사적 생애가 보내지는지를 실질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아무리 카토가 활동적인 정치인, 중재자(pleader), 작가, 상업투기자일지라도 가정생활은 언제나 그와 더불어 존재의 중심목표를 이루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위대한 원로원의원보다는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 더 나앗던 것이다. 카토(Cato) 가(家)의 가정생활    그의 집안에서의 규율은 셌다. 하인들은 집을 명령없이 떠나게도 외부자에게 가내에 일어난 일을 말하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더 가혹한 처벌을 변덕스레 입히지 않았지만 판결은 준사법절차에 따라 공포시행되었다. 죄의 처벌에서의 엄격성은 주인 명령없이 구입결정을 한  그의 노예 중 하나가 카토의 귀에 그 문제가 들어가자 스스로 목을 멘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식탁에 대기하면서 범한 잘못같은 경미한 죄에 대해 그 집정관급 인사는  식사후 자기 손으로 휘두르는 가죽끈으로 적당한 수의 째찍질을 집행하였다. 아내와 자식들도 못지 않게 엄격하게 군기를 잡았지만 다른 수단을 썼다. 노예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아내나 다자란 아이들에게 손대는 것은 죄의식을 가질 일이라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선택에서 그는 돈을 위해 장가드는 것을 인정치 않았으며 남성들에게 좋은 후손을 찾아보라고 추천했었지만 자신은 늙은 나이에 그의 가난한 비보호인(client)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게다가 노예국가상에 모든 곳에서 성행하는 것과 유사한 남편측에의 금욕에 관한 견해를 채택하였다. 아내는 그에게 철저히도 단순한 필요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의 저술들은 수다떨기, 세련된 연애, 다스려지지 않는 부녀자들에 대한 욕설로 넘쳐난다. "모든 여자들은 성가시고도 자부심이 많다"는 것과 "남자가 여자를 끊는다면 우리 생은 아마도 신에 경건하지 않을 일이 아마 덜할 것이다"라는 것이 그 옛 귀인(貴人)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혼외출생의 아이 기르기는 그의 마음과 그의 명예를 건드린 문제로서 눈앞에 아내는 엄격하고 오로지 그의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상적으로 그들을 몸소 돌보거나 아이들이 여성 노예들에 의해 젖을 물리는 것을 허락한다면 댓가로 그녀 또한 자기의 가슴을  영양을 위해 그들 자식들에게 허용했다.  후자는 인간의 동점심의 유대-공통적 모성 자극이며 양형제애(養兄弟愛)의 접합-에 의해 노예제 입법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지시하는 드문 특성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늙은 장군은 몸소 가능한 때면 언제든 그의 아이들을 씻기고 기저귀채우는데 참여했다.그들의 아이같은 순결성에 대해 숭고한 주의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그가 주의깊기에 베스타의 처녀들(Vestal Virgins)가 마치 참석한 것처럼 된 때를 제하고 아이들이 존재앞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지 않았으며 딸들 눈앞에서 천둥번개 중에 놀랄 때를 제하고는 그 어머니를 껴앉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아들의 교육은 아마 그의 다양스럽고 다채롭게 영예로운 활동의 귀족적인 부분이었다. 좋을 혈색띈 소년이 창백한 소년보다 더 가치있다는 그의 금언에 진실하게도 그 늙은 병사는 몸소 그의 아들을 전신체적 훈련을 시작하게 했고 레슬링, 기마, 수영, 복싱, 내한(耐寒)·내서(耐暑)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 좋은 농주나 병사로 충분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아이를 힐책하고 처벌해서 존경을 취하는 선생은 단순한 노예일 뿐임을 나중에 배운다면 아이의 마음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음이 감지되었다는 것을 아주 정당하게도 느꼇다.  그런까닭으로 그는 몸소 아이에게 로마인이 배우고 읽고 쓰고 아는 것 로마 땅의 법을 가르쳤고 그의 훗날에조차 헬렌(the Hellenes)의 일반 문화에 너무도 깊이까지 작업해 나가서 그의 아들에게 모국어로 로마인에게 쓸모있다고 여겨진 문화상의 모든 것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그의 저술들이 주요하게 그의 아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며 자신의 손안의 큰 특징있는 글자들로 그 아들의 이용을 위해 그의 역사적인 작업을 썼다. 그는 가정적이고 절용적인 문체 속에 살았다. 그의 엄격한 인색함은 사치에 대한 어떤 지출도 인내하지 못했다. 어떤 노예도 1500 데나리우스(denarius) 즉 65 파운드 너머는 치르지 않았고 어떤 드레스도 100 데나리우스 즉 4파운드 6실링 이상은 치르지 않았다.  어떤 양탄자도 그의 집에는 보이지 않았고 오래동안 방안 벽엔 백색도료가 없었던 것이다. 일상적으로 그의 하인과 같은 식사를 했고 30 아스(ass) 즉 2실링을 초과치 않도록 현찰로 밥에 드는 경비를 완충하지 않았다. 전쟁 때에 술(wine)조차 그의 식탁에서 일정하게 추방되었으며 그는 물을 마셨고 상황에 따라 식초를 섞어 마셨던 것이다. 반면, 그는 환대에 있어 적(敵)을 두지 않았다. 소도시의 그의 클럽과 나라 안 이웃한 지주들 양자와 교제하는 것을 즐겨하였던 것이다. 식탁엔 오래 앉았고 다변한 경험과 기민하고 준비된 위트가 유쾌한 동료로 자신을 만들어 감으로써 주사위나 와인용기도 업신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농사에 관한 그의 책내의 다른  영수증 중에서 그는 아주 배부른 밥과 아주 깊은 음주으 경우에도 숙련된 조리법을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극도의 늙은 나이에 이르는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활동의 하나였다. 모든 순간이 배당이 되어 몰두되었으며 모든 밤에 그가 그 날 들고 말하고 한 것에 대해 그의 마음을 넘어 귀기울이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그는 친구와 국가의 일은 물론 자신의 일을 위한 시간을 찾았고 대화나 즐거움을 위한 시간 역시 찾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많은 말없이 행해졌고 그의 활동성있는 진짜 정신은 부산함이나 사소한 것에 대한 큰 소동같은 것은 미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적 나태와 그리스적 부도덕과 대비되는 로마의 (확실히 다소 거칠게 지어진) 활력과 정직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그의 동시대인과 후손에게 로마 자치회원의 진정한 모델로 간주되었던 사람이 그리 살았다. 로마 시인이 말한대로

Sperne mores transmarinos, mille habent offucias. Cive Romano per orbem nemo vivit rectius. Quippe malim unum Catonem, quam trecentos Socratas.(해외의 습관은 일축하라. 그들은 천의 의무륽 가졌다. 지구를 통틀어 누구도 로마 시민처럼 올바로 살지 못하니 , 진실로 내를 삼백의 소크라테스 이상 카토를 그리게 하라!   -Florus의 글에 대한 어떤 영문 번역 참조)[3]

라 할 것이다. 이런 판단은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조심스레 이 시기 타락한 헬렌주의(Hellenism)가 로마인 중의 삶과 사상의 방식에서 성취한 혁명을 고려한 모두들이 외국 생활방식에 대한 그런 비난을 감경하기 보다는 올려놓으려 할 것이다.

새 생활방식

가족생활의 유대는 공포스런 속성(速性)으로 느슨하게 되었다. 그리젯(grisettes)과 소년취향이란 악이 페스트처럼 퍼졌고 실상대로 그에 대한 입법을 통한 방식의 어떤 실제적 단계도 취하는 것이 가능치 않았다. 카토()가 감찰관()으로서 사치를 위해 유지되는 이 가장 가공할 노예종(奴隸種)에 둔(570) 높은 세금 대단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게다가 일반적으로 재산세금과 일이년 후 실질적으로 폐지상황으로 떨어졌다. 독신주의-이에 관해 일찌기 520년에 과한 불평이 있었다-와 이혼이 자연스레 비중상 증가했다. 끔찍스런 범죄들이 가장 높은 계급의 가정의 품에 영속화되었다. 예로 집정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그의 아내와 양자에게 독살되었는데 집정관 보궐선거를 실시하려고 해서 후자에 대한 최상의 정무관직을 획득케 하려는 것-성공적 기도(574)-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자에 대한 해방이 시작되었다. 옛 관습에 따르면 결혼한 여자는 법적으로 부계권력에 대등한 결혼권력(marital power)에 미혼 여자는 부계권력(paternal power)에 거의 뒤지지 않을 가장 가까운 남성 아그나티(agnati)의 보호심에 속했다. 아내는 자신의 재산을 전혀 가지지 못했고 아버지가 없는 처녀와 과부는 아무튼 전혀 관리의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자들은 재산 관련의 독립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얼버무리는 법률가의 방편-특히 위장 결혼-으로 아그나티(agnati)의 보호심에서 벗어나서 자신들 손에 재산관리를 얻거나 결혼의 사건에서 법의 엄격한 글자아래 필요한 결혼권으로 부터 스스로를 철회할 그다지 많이 낫지 않은 수단으로 추구하였다. 여자들 손에 수집된 자본량은 그 시기 정치가들에게 아주 위험하게 나타나서 그들은 법으로 여자에 대한 상속자로서의 증언적 지명을 금하는 과장된 방편을 지향하며 증언없이 그들에게 떨어질 방계상속의 대부분을 빼앗는 아주 임의적인 실행(585)조차 추구하였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결혼·교사권력과 연결된 여자에 대한 가정사법권의 시행이 실질적으로 더욱더 구식화되었다.  공공문제에서조차 여자들은 이미 자기 의지를 갖기와 카토(Cato)의 생각대로 "세계의 지배자들을 지배하기"를 시작했다. 그들의 영향이 자치회기구에 흔적이 남아 이미 로마 여성을 위해 조상(彫像)이 세워졌다.

사치

드레스와 장식물 가구에 빌딩과 식탁에 더욱더 사치가 성행하였다. 특히 소아시아(Asia Minor)의 564년 원정이후 에페소스(Ephesus)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같은 아시아-헬렌적(Asiatico-Hellenic) 사치가 돈 시간 흥미면에서 한결같이 파괴적인 사소한 것에서의 그 공허한 세련됨과 방식을 로마로 전달하였다. 여기서도 여자들이 주도했다. 카토(Cato)의 대한 열난 욕설에도 불구하고 칸나에(539) 전투 후 곧 통과된 민회의 법령에 대해 카르타고와의 평화 이후에(559)박탈을 획득했는데 그것은 금장식이나 알록달록한 드레스나 그런 전차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적인 적대자들에게 이런 품목에 대한 높은 세금을 과하는 외의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570). 새롭고 대부분 시시한 품목의 다수-우아하게 새겨진 은접시와 동윤곽(銅輪廓)의 식탁세트와 소위 아탈루스 드레스(attalischen Gewänder) 와 풍부한 금수(錦繡)의 양탄자-가 지금은 로마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무엇보다 이 새로운 사치품이 식탁용으로 나타났다. 이제껏 예외없이 로마인들은 하루한번 뜨거운 요리를 섭취했었다. 이제는 뜨거운 요리가 이차의 밥(prandium)으로 비번찮지는 아니하게 만들어졌고 주된 밥으로 전에 사용된 두 과정은 더 이상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이제껏 가내의 여자들은 스스로 빵굽기와 요리하는데 참여했고 한결같이 요리와 굽기를 감독하는 직업요리사가 특히 고용된 것은 겨우 연회석 뿐이었다. 반면 이제 과학적 요리법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윤택한 집에서는 특별한 요리사가 계속 있었다. 그 노동 분야는 필수적으로 되어 빵과 케익을 굽는 교역은 요리 교역에서 갈라져 나왔다-로마내의 첫 빵집이 583년에 나타났다. 미식의 기교에 대한 시들이 가장 맛있는 생선과 다른 해산물의 긴 목록과 함께 독자츠을 발견했고 그 이론은 실행으로 귀결되었다. 외국의 진미-폰투스(Pontus)의 멸치와 그리스(Greece)의 술-가 로마에서 평가되기 시작했고 그 나라의 보통 술에 코스(Cos)의 향을 소금물을 수단으로 주는데 대한 카토(Cato)의 조리법은 로마 포도주상인에게는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들과 그 아이들의 오랜 점잖은 노래와 암송이 아시아의 삼부키스트리아에(sambucistriae)에 의해 대신되었다. 이제껏 로마인들은 아마 저녁에 매우 심하게 마셨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주연(酒宴)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공식적인 왁짜지껄한 연회가 유행되어 그 경우에 술은 거의나 전혀 묽혀지지 않아 큰 컵째 마셨으며 각기 순차적으로 이웃을 따르도록 구속한 음주맹세가 주도적 특징-로마인의 소위 "그리스식을 따라 마시기(Graeco more bibere)" 혹은 "그리스따라 놀기(pergraecari, congraecare)"-을 형성했다. 이 방탕한 주사위 놀음은 의심할바없이 오래 로마인 중에 이용되었는데 그 결과 간섭입법이 필요한 비중에 달했다[4].  카토(Cato)는 뾰족한 돌로 포장된 시장을 게으른 짓을 멈출게 하려고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로마인들은 그 농담에 웃었고 계속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기쁨을 누렸다.

오락의 증가

우리는 이 시대의 대중적 오락의 놀라운 확장을 알아차렸다. 그 시작에 종교의식에 차라리 위치매겨질 몇몇 중요치 않은 보병이나 전차 경주는 별도로 단일한 일반 축제 하나만 겨우 9월달에 열려 4일간 정해진 고정 상한비용으로 지속되었다[5]. 이 시대의 폐막에 이 민중축제는 적어도 6일간의 일정이었고 이외에 4월의 시작때 제신의 어머니제(festival of the Mother of the Gods) 혹은 소위 메갈렌시아(Megalensia)가 4월의 끝으로는 케레스(Ceres)와 플로마(Flora)의 제(祭)가 6월에는 아폴로(Apollo) 11월에는 플레비아누스들의 놀음(Plebeian games)이 있었다-그 모두가 아마 이미 하루 이상을 점했다. 이에 놀음이 새롭게 기념되는 곳의 수많은 경우-짐작컨대 거기서 경건한 가책은 종종 단순 핑계로 역할했다-와 그칠새 없는 이상한 축제들이 추가되었다.  이들 중 이미 언급한 10분의 1세[6]로 준비되는 연회 신들의 축제와 개선과 장례의 축제는 뚜렷하고 무엇보다 에투루리아-로마 종교(Etrusco-Roman religion)로 사에쿨라(saecula)로 소위 구획표기된 보다 긴 기간간의 종료쯤에 기념되는 모든 축제경기-505년 처음-가 있다.  동시 가내축제가 배증하였다. 2차 퓨닉전쟁(Punic war) 동안에 훌륭한 민중들 속에 제신들의 어머니(Mother of the Gods)의 입국(550년 이후)과 더 낮은 계급중에 비슷한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의 경우(537년 이후)의 년주기(年周期)에서의 이미 언급한 연회들이 소개되었는데 양자모두 긴밀하게 동맹된 세력-외국 사제와 외국 요리사-의 영향하에서 였다. 아주 가까운 접근이 모든 게으름뱅이가 매일 시간을 죽일 곳을 알 이상적인 조건과 그것이 모두와 나머지들의 삶의 목적인 공화국내의 이와 게으른 오락에 대해 성립하였는데, 그 게으른 전통은 역시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 제일 준수상의 나쁜 폐도덕적 요소들은 게다가 매일 더 큰 수세를 확보해갔다. 예전과 같이 여전히 전차 경주가 전에 민족제전의 찬란한 피날레(finale)를 장식하고 이 시기의 한 시인이 집정관이 전차 출반 신호를 막 주고 있었을 때에 아주 생기있게 대중의 시선이 집정관에 매이게 한 긴장된 기대감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의 놀이는 더 이상 충분치 않았다. 새롭고 더 다양스런 장관 연출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선수들이 이제 (568년 처음으로) 토착의 씨름꾼과 권투선수들과 출현했다. 이 극적인 볼거리 중 이루호 우리는 다음 것을 말할 것이다. 그리스 희·비극의 로마로의 이식은 아마 의심스런 가치의 수득이나, 그것은 어쨌든 이 때 만들어진 수확 중 최고를 형성했다. 로마인들은 아마도 오래도록 공중앞에서의 토끼몰이와  여우사냥의 스포츠에 탐틱하였다. 이제 이 무구한 사냥들이 야생 동물들에 대한 정형적 미끼가 되어 아프리카의 야수-사자와 흑표범-가 커다란 비용으로 로마로 운반되어서 (처음은 568년까지로 증명할 수 있다)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으로 수도의 구경꾼의 눈의 요깃거리가 되도록 봉사하였다. 더욱 더 혐오스런 검투시합은 캄파니아(Campania)와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성행하였는데 지금은 로마(Rome)에 입장허가를 받았다. 사람의 피가 처음으로 로마 광장(Roman forum)에서 490년 스포츠를 위해 뿌려졌던 것이다. 물론 이런 폐도덕적 놀이는 심한 검열을 만났다. 486년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Publius Sempronius Sophus)는 그의 아내에 이혼장을 보냈는데 그녀가 장례 시합에 참석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로마에 야수를 가져오는 것을 금하는 민중의 입법을 수행하여 엄격하게도 검투사들이 공공축제에 나타나지 말기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시 필수적인 세력과 필수적 동력이 부족했다. 표면적으로 동물미끼 습관을 검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사설 축제 특히 장례 기념행사에서 검투사 집단의 출현은 억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못지 않게 공공은 비극배우보다 희극배우를 희극배우보다 줄타기곡예사를 줄타기곡예사보다 검투사를 선호하지 못하도록 되거나 무대가 헬렌적(Hellenic) 생활의 오염중에 선택으로 흥청거림을 못하게 되었다. 어떤 문화의 요소들이  무대와 예술의 오락상에 담지되든지에 대해 버려두고라도, 관람자 전체를 시가(詩歌)적 힘을 관통하여 최상의 레벨의 감흥으로 끌어올리는 것-비록 그것이 단지 잠정적이더라도-은 그리스의 무대가 그 수위의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혹은 정선된 그룹을 위한 예술적 즐거움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극장이 그러는 것처럼  절대 로마 축제의 시혜자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의 지배인과 관람자들의 성격은 587년 개석경기에서의 장면으로 예시되는데 거기서 첫 그리스 프룻주자가 흥겨운 선유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여 감독으로부터 연주대신 차례로 권투를 하도록 지시받았고 그에 대한 기쁨은 한량을 알지 못했다.  

그 악은 헬렌적 감염에 의한 로마 생활방식의 부패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거꾸로 학자들이 그들의 지시자들을 의기소침하게 했다. 검투시합은 그리스(Greece)에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처음 시리아 궁정에서의 로마인에 대한 공개적 모방자인 안티오코스 에피파테스(Antiochus Epiphanes) 왕에 의해 소개되었으며(579-590), 로마보다 더 인간전이며 예술심미적인 그리스 공중에서 즐거움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전율을 유발하였음에도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더욱 큰 지반을 갖고 점차 더욱더 유행화되었다.

물론 삶과 생활방식상의 이 혁명은 경제혁명을 수반하여 가져왔다. 수도 거주는 더욱 비쌀 뿐 아니라 더더욱 탐스러운 것이 되었다. 대여가 전례없는 높이까지 치솟았다. 엄청난 가격이 새로운 사치품목에 지불되었다. 흑해(Black Sea)로 부터의 멸치류 한 베럴(barrel )에 1600 세스테르티우스(sesterces  16 파운드pound)-시골 노예 값보다 비쌌다, 미소년 값은 24,000 세스테르티우스(sesterces 240파운드pound)-농주의 저택 값이상-이었던 것이다. 돈은 그런까닭에 또 오직 돈만 고하(高下)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리스(Greece)에서 그리스인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는 솔직함으로 인정한 오래도록 아무도 공으로는 어떤것도 하지 않았던 경우였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the second Macedonian war)이후에 로마인은 이 면에서 또한 그리스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존경스러움이 스스로에게 합법적 방볍을 제공해야 했다. 변호인이 예컨대 민중의 입법으로 그들의 봉사로 돈을 취하는 것을 금지당해야 했다. 법률상담자(jurisconsult)들만이 고귀한 예외를 형성하여 무상으로 좋은 충고를 하는 영예로운 관습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는 민중의 입법의 필요를 주지 아니했다.사람들은 가능하더라도 드러내놓고 훔치지는 않았지만 모든 곡행(曲行)들이 부에 신속히 도달하기 위하여 허용가능한 것으로 보였다-노략질, 구걸, 도급업자 측의 속임수, 관람자측에 대한 착복, 돈과 곡식의 고리대적 거래, 심지어 우정과 결혼같은 순도덕적 관계를 경제적 거래로 바꾸는 일까지. 결혼은 특별히 양측에 상업적 투기 대상이 되었다. 돈을 위한 결혼은 흔했으며 배우자가 서로에게 한 선물의 법적 유효성을 거부할 필요가 있게 보였던 것이다. 이 상태하의 계획은 수도의 모든 측면에 불을 지피려는 의도로서 당국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움을 유발시킬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작업상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단순히 가능한 한 빨리 즐거움에 도달키 위해 작업할 때 그가 범죄인이 되지 안았다는 것은 단지 우연히 그런 것이다. 운명은 후한 손으로 로마인에게 권력과 부의 모든 영광을 퍼부었지만 진정 그 판도라()의 상자는 의심스런 가버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13장의 주석

1. 아시아게노스(--Asiagenus--)가 마그네시아(Magnesia)와 그 후손들의 영웅에 대한 원래적 칭호였다는 것은 동전과 명문(銘文)으로 확립되었다. 카피톨의 파스티(Capitoline Fasti)가 그를 아시아티쿠스(Asiaticus)라 부른다는 사실은 이들이 비동시대적 검토를 겪었다는 것을 지시하는 여러 흔적 중 하나이다. 전자의 이름은 오직 아시아게노스(--Asiagenus--)의 퇴화-훗날의 작가들이 그에 대해 대치한 형태-로 아시아()의 정복자가 아닌 태생적 아시아인(Asiatic)을 표시하는 것이다.

2. II. VIII. Religion

3. [역주(譯註). 이 번역 초판에서 나는 몸젠(Mommsen) 박사의 독문판에 의거 영문상 이 줄들을 넣었고 주석에 내가 원본을 찾을 수 없음을 덧붙였다. 내가 자문을 구한 여러 학자들은 더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몸젠 박사는 그 때 베를린(Berlin)에 부재하였다. 초판이 나타난지 얼마안되 나는 조지 코네월 루이스(George Cornewall Lewis) 경으로 부터 그것들을 플로루스(Florus 혹은 플로리도스Floridus)로부터 Wernsdorf, Poetae Lat. Min. vol. iii. p. 487 상에서 찾으라는 것을 내게 알리는 고지를 받았다.  그것들은 따라서 1868년 개정판의 라틴어 텍스트로 부터 주어진다. 바에렌스(Baehrens)가 Poet. Lat. Min. vol. iv. p. 347상에서 오푸키아(offucia)를 읽고 있는 루키안 물러(Lucian Muller)를 따른다.]

4. 플라투스(Plautus)의 쿠르쿨리오(Curculio)상의 파라바시스(parabasis) 일부는 그 수도의 시장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마 약간의 유머로 일상의 특징들과 함께 묘사한다.

Conmonstrabo, quo in quemque hominem facile inveniatis loco, Ne nimio opere sumat operam, si quis conventum velit Vel vitiosum vel sine vitio, vel probum vel inprobum. Qui perjurum convenire volt hominem, ito in comitium; Qui mendacem et gloriosum, apud Cloacinae sacrum. [Ditis damnosos maritos sub basilica quaerito. Ibidem erunt scorta exoleta quique stipulari solent.] Symbolarum conlatores apud forum piscarium. In foro infumo boni homines atque dites ambulant; In medio propter canalem ibi ostentatores meri. Confidentes garrulique et malevoli supra lacum, Qui alteri de nihilo audacter dicunt contumeliam Et qui ipsi sat habent quod in se possit vere dicier. Sub veteribus ibi sunt, qui dant quique accipiunt faenore. Pone aedem Castoris ibi sunt, subito quibus credas male. In Tusco vico ibi sunt homines, qui ipsi sese venditant. In Velabro vel pistorem vel lanium vel haruspicem Vel qui ipsi vorsant, vel qui aliis, ut vorsentur, praebeant. Ditis damnosos maritos apud Leucadiam Oppiam.(각인各人을 쉽게 만날 장소를 내 보여줘 그가 너무 많은 어려움을 통해 헛수고하지 않게 하겠다. 누구라도 악당이든 아니든 선량하든 신의없든 만나기를 희망한다면 말이다. 위증하는 녀석과 만나기를 바라는 자는 법정으로 거짓말장이와 허풍장이를 원하는 자는 크로아키나Cloacina로 각각 가게 한다. [부유하고 그릇된 남편들은 바실리카Basilicahe 정청에서 당신을 구할 것이다. 역시 다닳은 매춘부와 그들과 흥정하곤 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소풍만찬을 기부할 자는 생선가게에서 찾을 수 잇을 것이다. 포룸(Forum)의 낮은 부분에서 선량하고 부유한 남자가 걸어다닌다. 운하근처의 중앙에는 야바위꾼이 있다. 쿠르티아 호수Curtian Lake너머에 무례하고 수다스럽고 악의를 가진 녀석이 있는데 대담하게 아무 이유없이 다른 사람을 중상하며 그들에 맞서 말할 것을 충분히 가졌다. 옛날 가게엔 이자받고 빌려주는 이들과 빌리는 이들이 있다. 카스토르 사원Temple of Castor  뒤로  당신이 방심한 채 빌려줄 이들이 있다. 에트루리아 거리에 스스로를 팔려 나온 사람이 있다. 벨라브룸Velabrum에선 빵집주인 혹은 도살업자 혹은 점쟁이를 찾아낼 것이다.스스로 소매하든 다른 것이 소매로 팔리게 공급하든 말이다. 부유한 죄지은 남편들을 오피아누스 레우카디아(Oppian Leucadia)의 집에서 찾으리라. -Henry Thomas Riley, 1912 역의 Pl. Cur. 4.1 참조)

 

이 운문이 잇단 추가부로 첫 로마 바자회(bazaar)의 건축(570) 후 삽입된다. 빵집주인(pistor,축자적으로 방앗간집주인)의 사업은 이 때 별미음식 판매와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제공 등(Festus, Ep. v. alicariae, p. 7, Mull.; Plautus, Capt. 160; Poen. i. a, 54; Trin. 407)을 망라하였다. 정육점주인도 같은 경우다. 레우카디아 오피아(Leucadia Oppia )가 나쁜 명성의 집을 유지했을지 모른다.

5. II. IX. The Roman National Festival

6. III. XIII. Religious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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